4 장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나다
1.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유충이 잠자리가 되는 것과 같이 비유할 수 있다.
알에서 깨어나 유충이 되고, 유충이 탈바꿈하여 잠자리가 된다. 그래서 잠자리는 유충으로 자랐던 고향, 개울가나 웅덩이를 못 잊어 그 위를 빙 빙 돈다. 사회에 나간다는 얘기는 유충이 잠자리가 되어 웅덩이를 떠나듯, 집안에 갇혀서 내 마음대로 하던 가정을 떠나 허허벌판으로 나가는 것과도 같다.
사회에 나가 봐야, 비로소 세계가 얼마나 넓고 아름다우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 수 있다.
사회에 나가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사실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나’다.
아직 내가 그것을 모르고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50여 년 전,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그때가 생각난다.
사회 물정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회사에 입사하여, 모르는 사람뿐인 조직에 합류하여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게는 좋은 사람도 생기고, 안 좋은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어쩐지 대하기 힘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할수록 더 대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같은 날 열 명이 함께 입사했는데 그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모두 다르고, 싫어하는 사람이 모두 다르다.
같이 입사한 친구 수천이나, 영웅이는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시간만 나면 그들과 탁구도 치고 잡담도 하는 반면, 나는 사무실 직원보다 현장 직원들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었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2,3 년 지나면 모두와 친하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감이 줄어든다. 작업장이 바뀌고 환경이 변해도 나는 그들을 흡수하고 결국은 그들과 하나가 되어간다. 때에 따라서는 영영 합해지지 않을 것 같은 특수한 부류의 사람도 없진 않지만, 대개는 하나가 되어간다.
군산에서 3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부산에 와서 새로운 회사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처음처럼 백지상태에서 시작했다. 당시는 지방색이 심해 사투리를 쓰는 것이 겁났다. 전라도 사투리를 부산에서 쓰면 상대 편 얼굴이 금방 달라진다. 그럴 때는 더 친숙하게 언행을 해야지 거칠게 대하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부산 차를 몰고 전라도에 갔다가 기름을 넣으려면 눈치를 봐가면서 조심해야지, 함부로 이야기하면 주유거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큰 탈 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보면 상황에 맞게 적응을 잘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
어떤 상황을 당하더라도 거기에 맞게 살도록 되어있는 것이 인간인 모양이다.
일본에서 살 때에도 그들의 말을 써야지, 일본말을 모른다고 우리말을 쓰면 그들은 응대를 안 한다. 언제나 상대의 말을 듣고 상대와 하나가 되어야, 그도 내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해준다. 이렇게 내가 먼저 상대와 하나가 되어 주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이가 좀 가까워지면, 내가 말을 안 해도 원하는 대로 상대가 해 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옛날, 사회에 나오기 전, 가족에게서 배운 응석인 어린양 때문이다. 사회에 나가면 어린양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낯선 땅인데도, 몸에 밴 습관이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잠자리가 유충시절의 개울가가 그리워 그 위를 빙 빙 돌듯이, 사람은 나도 모르게 어린양을 하는가 보다.
사실 상대는 나의 선생이고, 나의 또 다른 일면이다.
상대가 틀리면 그것을 보고 나는 안 틀리려고 하고, 상대가 잘하면 나도 잘해서 칭찬을 받으려고 한다. 경쟁자나 상대가 없으면 나의 성장은 멈추고 만다. 따라서 상대는 나에게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회에 나간다는 말은 유한(有限) 성장의 틀을 깨고, 무한(無限) 성장의 장(場)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성장하는 데 있어서는 상대방이나, 스승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에 따라 성장의 폭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은 안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성장하기는 불가능하다. 성장하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굳히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유충은 잠자리의 세계를 상상할 수가 없다. 기껏 해 봐야 웅덩이의 범주에서 50 보 100 보다. 그러나 잠자리가 되면 찬란한 아침 이슬도, 황홀한 저녁노을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잠자리가 되어서도 웅뎅이만 빙빙 돈다면, 유충시절과 크게 무엇이 다르랴!
기적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 이뤄질 때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으나, 성령의 힘으로 기적이 일어난다고 기독교인들은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기적이라는 말을 쓰고 있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기적은 나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나의 힘이 소진되어, 더 이상 나의 힘으로는 될 수없을 때, 제3의 힘이 작용하여 일어난다. 줄탁동기라는 말이 그것이다. 달걀 안에서 밖으로 튀쳐 나오려는 자체의 힘이 극에 달 했을 때, 밖에서 어미 닭이 살짝 쪼아 주면 달걀에서 병아리가 탄생한다. 우리가 볼 때는 한갓 자연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달걀이 변하여 살아 숨 쉬는 병아리가 되어, 삐약거린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고 누가 부인하랴!
계란이 자기 힘 만으로는, 병아리가 되기 위해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될 수가 없다. 계란은 어미닭이 품어줌으로 인해 부화라는 기적이 일어나고, 그것도 줄탁동기라는 인연으로 완성되어, 세상에 새 생명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계란이 어미 닭의 품 안을 싫어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어미 닭 품을 튀쳐 나와 버린다면....
우리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기적을 만들어가는 과정들이라고 할 수 있다. 기적을 만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남과 내가, 서로를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인정한 것이 힘이 되어, 함께 일하게 됨으로써 서로에게 이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적을 위해서는 소아(小我)의 죽음이 필요하다. 죽을힘을 다해,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이를 때까지, 나의 최선을 다해야 하는,
작은 나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이기적인 내가 죽는 순간,
비로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 부활의 신비를 신앙의 으뜸으로 삼고 있으며, 불교에서도 신앙의 근본을 무아(無我) 사상에 두고 있다. 나를 뽐내는 나 위주의 생활에서 벗어나, 나에게도 유익하지만 상대에게도 이로운, 자리이타 의 삶을 살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어린양 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소아적 생각이다. 상대를 생각하기보다 나만을 생각한다.
불편하고 싶지 않고, 쉽게 이루고 싶으며, 손해보고 싶지 않은, 나 중심의 성숙되지 않은 어린애 같은 사고다. 어린양 은 결국에 가서 나를 어리석게 하고, 병들게 하며, 나아가 조직을 파괴시키고 만다.
사회에 나가려면 먼저 이 어린양에서 벗어나야 한다.
애벌레는 잠자리가 되면서 애벌레의 허물을 완전하게 벗어 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냄새나는 시궁창을 벗어나, 푸른 착공을 마음껏 날기도 하고, 예쁜 풀잎이나 꽃잎에 입맞춤하는 것이다.
냄새나는 시궁창에서 애벌레처럼 평생을 살 것인지, 아니면 잠자리처럼 푸른 창공을 마음껏 날면서 세상을 즐기면서 살 것인지, 그것은 오로지 지금, 내가 택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