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5분이면 충분하다
5. 내 생각 하나만 바꾸면
이기는 사람이 살아남을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서 보면, 이긴 사람은 몰락하여 사라지고, 살아있는 사람은 오히려 젔던 사람인 경우가 많다. 이기는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고,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포스코나 현대제철에서 생산하는 철판(鐵板)을 우리가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철판으로 밥을 떠먹을 수도 없고, 물을 퍼 마실 수도 없다.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만들려면 철판을 성형하여, 용기(容器)를 만들어야 우리가 사용하는 그릇이 된다. 뻐쓰나 승용차, 군함이나 탱크도 역시 철판 자체가 아닌 철판으로 만든 成形品(성형품)이다. 철판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냉장고가 되는 것이 아니고, 전쟁에 쓰는 무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철판을 성형(成形)할 때는 푸레쓰라는 기계를 쓴다. 이때 철판이 强(강)하여 푸레쓰를 못하게 되면 철판은 철판 그대로의 모양을 유지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려는 그릇은 만들어지지 않고, 푸레쓰만 상하거나 부서지고 만다.
반대로 철판이 약(弱)하여, 푸레스 하는 대로 따르게 되면 철판의 형상은 없어지지만, 그 대신 그릇 모양의 용기가 만들어져, 우리의 생활을 이롭게 해주는 주방기기가 만들어진다. 뻐쓰나 탱크도 마찬가지로 철판이 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성형품들이다.
强(강) 하기 때문에 푸레쓰가 안 되는 철판은, 열처리(熱處理)를 하여 성형이 되도록 부드럽게 만든 후에 푸레쓰를 한다. 푸레쓰 이론을 보면, 탄성 한계(彈性限界)를 넘어 임계점 (臨界点. Yield Point)을 지나야 만 비로소 소성(塑性) 가공이 가능해진다. 임계점은 철판이 철판이기를 포기하는 점(点)으로, 졌다고 항복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철판도 철판이기를 포기해야만 비로소 식기나 국그릇으로, 나아가서 탱크나 뻐쓰로 만들어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태어난 상태 그대로 일생을 사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개는 변(變)하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능력이 향상되면서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져 간다.
우리가 돋보기로 물건을 보거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영상이 실물(實物) 보다 크게 보인다. 또 물이 들어있는 컵에다 젓가락을 넣으면 곧았던 젓가락이 꺾긴 것처럼 보인다.
또 달리는 기차에서 차창밖을 보면, 기차가 가는 것이 아니고, 차창밖의 전봇대나 빌딩이 지나간다. 기차가 움직이지 전주(電柱)나 건물이 움직일 리가 없건만, 우리의 눈에는 분명히 전봇대나 빌딩이 움직인다.
이와 같이 우리의 5감으로 보고 느끼는 것은 事實(사실)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고 느끼는 현상(現象)을 마치 그것이 진실(眞實) 인양,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라고 말이다.
현상 세계도 물론 알아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실(事實. 本質. Fact)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현상 세계의 모든 것들은 결국 사실대로 이뤄 저 가기 때문이다.
철판은 철판이기를 포기해야 그릇이나 자동차가 되었다. 푸레쓰가 안 되는 철판에서 푸레쓰가 되는 철판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소둔(燒鈍)이라는 열처리(熱處理)를 거친다. 압연(壓延) 조직인 침상 조직(針狀組織)을 활엽수(闊葉樹) 같은 조직으로, 재결정(再結晶)되는 열처리 즉 소둔(燒鈍) 공정이다.
철판이 열처리 과정을 거쳐 성형이 가능한 철판으로 바뀌듯이, 사람도 열매에서 씨앗으로 바뀌는 과정을 거쳐야 승자(勝者)가 된다.
열매로 있는 상태, 그러니까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상태의 ‘나’를, ‘열매의 나’라고 하자.
열매는 땅에 묻히면 ‘씨앗’이 되어 썩고, 썩은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다시 ‘열매’를 맺는다. ‘열매’가 ‘씨앗’이 되기를 거부(拒否)하면, 열매는 열매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열매가 ‘자기를 포기’(抛棄) 하고 씨앗이 되어 땅에 묻혀 썩으면, 새로운 열매를 맺게 되어, 50배 100배의 수확을 거두게 된다.
열처리하기 전(前)의 철판은 열매라고 할 수 있다면, 소둔은 열매를 땅에 묻어 씨앗이 되도록 하는 과정(過程)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쳐야 열매를 맺는 씨앗, 즉 철판 이기를 포기한 철판이 되어, 자동차나 냉장고 같은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철판은 철판으로만 존재하면 패자(敗者)가 되지만, 열처리 과정을 거쳐 냉장고나 자동차로 바뀌면 승자(勝者)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도 이 ‘씨앗이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받기만 하는 존재’에서 ‘주는 존재’ 즉 내가 더 큰 이익을 위해 작은 손해는 볼 줄 알 때, 우리도 승자가 된다.
여자가 처녀이기 만을 고집하면 여자로서 존재할 수는 있다. 이런 여자를 훌륭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자가 아이를 낳는 진통, 즉 목숨을 건 사생결단의 아픔을 거쳐, 아이를 낳고, 자식을 키우게 되면, 우리는 이 여자를 훌륭한 여자 즉, ‘어머니’라고 부른다.
여자가 여자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임신을 하여 산통을 거친 여자는, 열매에서 씨앗으로 바뀌어 새로운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된 것이다.
한 여자가 자기를 희생시켜, 어머니가 되면 사랑받는 안 해(아내)로서, 존경받는 어머니로서, 대를 잇는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어머니의 희생으로서만, 인간은 이 세상에 탄생되는 것이니, 어머니의 은혜는 가이없으며, 어머니의 은혜는 갚을 길이 없는 것이다. 어머니의 희생이 없다면 역사도 없고, 후손도, 선조도, 세상 자체가 있을 수 없으니, 얼마나 숭고한가?
받기만 하면 죽는다.
받는 것만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는 거지 근성에서 탈피해야 한다.
주어야 산다,
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확실한 믿음이 없으면 줄 수가 없다.
농부의 씨 뿌리는 용기는 대단한 용기요, 믿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농부는 땅이 거짓말하지 않음을, 땅의 성실함을 믿기 때문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가 먹을 양식을, 새끼들과 함께 앞으로 먹기 위해서, 나의 배고픔을 참아가면서 혹독한 이 춘궁기에 볍씨를 땅에 뿌리는 것이다. 이 믿음이 결실로 이어져 50배 100배의 수확을 거두고, 우리 모두를 살게 한다.
의심하는 마음에서, 믿는 마음으로,
받으려는 마음에서 주는 마음으로, 바꿔야 한다.
여자이면서도 어머니 같은 삶을,
사원이면서도 경영자 같은 삶으로 바꿔야 한다.
고통이 따르고, 희생이 따르지만,
값진 인생이 거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농부가 즐거운 마음으로 못자리에 씨를 뿌리 듯,
산모가 옥동자의 탄생을 위하여 진통을 이기듯이,
내 마음 하나만 바꾸면,
세상은 그냥 천국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좋고 안 좋고는, 세상의 문제가 아니고,
오직 나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느냐, 혹은 없느냐,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