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시체를 아시오?". 사후경직에 마음대로 휘둘러저 엎어질 물들을 들고 한 차례 각설이 타령을 할 손님을 말이오. 그건 비극이오. 자신이 시체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없이 돌아다니는 것이니. 결국엔 자신이 그저 죽은 육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렇게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네.
깨져버리는 것과 비슷합디다. 처음 모양새를 만들면, 그것은 영원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파편이 되고 육편이 되는 순간,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단 말이오.
유목민. 그래, 자유로운 유목민의 시체는 새에게 쪼여져 하늘로 돌아간다고 들었소. 그렇게 나는 한 마리 새가 되고 싶소. 내장이 파먹히고, 눈알이 까마귀 발에 쥐여져도, 이 땅에 다시 돌아오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아이러니하지 않소? 생명체가 죽고 싶다는 욕망을 느낄 수 있다니 말이오. 과연 답은 무엇인지, 그대도 같이 생각해봅시다. 생명체의 끝은 결국 죽음일지, 영생일지. 어떻게 보면, 죽음을 추종하는 생명체가 그 진화의 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멸종, 일각에서는 하나의 비극으로만 보지만, 이 또한 결국 각설이타령의 가위소리와 다를 것이 뭐가 있겠소.
다 하나의 음파인 것이오. 유목민의 죽음을 탄식하는 진혼곡처럼 하늘로 울려퍼지는, 그런 새와 같은 존재 말이오. 종교같은 헛소리는 엿과 바꿔먹지도 못하니 공병보다 못한 존재라는 사실이 또 다른 아이러니요.
비극의 윤회. 오늘만큼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충동에 취해 아무것도 안하고 단지 적흑의 농락을 당하고 싶소. 광인의 이야기를 아는 자 또한 광인 아니리까? 광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오? 아마,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고귀하면서 비극적인 카타르시스 - 하지만 이것은 전혀 기쁘지 않으니 이 또한 틀린 표현이구려 - 의 절정에서 한 발짝 물러나 초자아에게 건네는, 한 마디 조언과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바다, 바다를 보면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시오? 무진기행에 나오는, 찰나의 일탈과 그릇된 로맨스를 생각한다면, 그대는 참으로 이 세상에 적합한 인물이 아닐까 싶소. 그러나 어떤 광인은 바다를 보면 광장에 나오는 중립국행 배를 생각한다고 했소.
유기체의 고향, 저 푸른 액체의 향연이야말로 우리가 정말로 돌아가야 할, 태초의 땅이 아니겠는가? 그 곳으로 돌아간다는 상상만 하여도, 이 마음은 마치 히로뽕 한 병을 들이킨 것처럼 몽롱하게 빛나는 것이오.
그런 정신의 황혼에서 등대를 바라보는 것 - 형태는 상관없소만, 불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면 낫겠구려 - 이야말로, 환멸의 끝에 선 지식인이 바라는 한 형태의 절망이라오.
하지만, 그 광인은 정말로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그 때를 회상하리다. 그 끝에서, 등대가 아닌 깃발을 보고 싶다고 하였소.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한 편의 오페라! 그것은 단순히 깃발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화려하고, 한편으로는 황량합니다. 무가치한 것들이란 그런 것이지. 사치스럽지만, 정작 죽음의 끝에선 차가운 관전자로 변절하는 것들.
그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겠소? 그러니, 바다를 사랑한 노인의 이야기는 결국 희극 - 혹자는 그것이 비극이라 주장한다만, 뼈만 앙상하게 남은 생선을 무시하는 텅 빈 인형들의 허언 따윈 무시하시오 - 으로 끝나는 이유요. 그것은, 너무나도 아련한 기억의 단편이기 때문이오.
광인은 다짐했다오. 그 바다로 향하겠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무거운 족쇄가 채워져 있구려. 그것은 - 광인의 말을 이해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 바로 펜이오. 하하, 이 무슨 썰렁한 농이라니. 그렇지만, 펜만큼 무거운 것은 세상에 없다오.
인류에게 문자라는 수갑이 채워진 이래, 지식의 노예가 되어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오. 그래, 최초의 지식인은 농부입디다. 그들의 땀이 지혜고, 그들의 주름이 지식이며, 그들의 노동요가 하나의 명연설이니. 한 번 나중에 전원생활로 복귀하게 된다면, 이 말을 다시 되씹어보시오. 아마 오두막에 누워 한가로이 막걸리를 들이켜는 할배의 모습 위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온갖 지식인의 모습이 겹쳐보일테니 말이오.
그리고, 그 광인 위에 겹쳐진 모습은 아마 바다를 사랑했던 노인일테지. 아니면, 찰리 채플린 일수도 있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오. 그것은 바로 인지의 왜곡, 그래. 쉬운 용어로 '착시' 라는 것이오. 그 광인은 자신 위에 비쳐보인 그들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잠재성이라고 생각한 것이지. 소주 한 잔에 차갑고 맑게 쓸려내려갈 가면인 것을, 그가 알 방도가 전혀 없었다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펜을 써내려갔소. 도자기를 굽는 노인이 가장 아름다운 때를 정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지선다의 스핑크스 앞에 서버리곤 맙니다. 태초의 조각을 장렬히 태우는 망나니의 땀방울과, 그렇게 쌓인 시체 앞에 쓰러져, 그들과 마침내 하나가 되어 식어가는 재. 그런 경향성이 아닐까 하오. 펜의 촉이 나가버릴 때까지, 결말로 융합하는 통시적 고찰이 광인에겐 남겨져 있었던 모양이지.
그렇게 써진 유서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시오? '책'이오. 옆에 웅크린, 백색의 통 안에 들어있는 72개의 흰 마침표들은 결국 본 주인을 찾지 못했다고 아쉬워 할 필요는 없는 것이, 광인 의 시체는 드디어 중력을 거슬러, 지성의 횃불과 같이 처음으로 일어났으니 말이오,
그것을 아시려나 모르겠소. 모든 형형색색의 물감을 한 데 모으면, 결국은 먹이 되어버립디다. 그래, 얼굴이 비었다는 것은 역으로 그 얼굴이 겪였던 모든 표정들의 합집합이 발현되었다는 뜻인고로, 그의 발걸음엔 한 치의 고민이 없었소. 가죽을 털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상징의 결정체가 가진 아이러니를 아는가? 프로작처럼 달콤하고, 쟈낙스만큼 향기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생명보다 가늘고 금강옥보다 무가치한, 그 정제. 기이한 것은, 이것만 있으면, 적토마보다도, 천리마보다도 날랜 철마를 탈 수 있단 것이오. 광인은 신기하기만 했다오. 이 낙엽을 위해, 그 많은 인형들이 강철을 나르고, 허수아비가 되어 참새들을 쫓아내었다니? 이 또한 하나의 반어법일 뿐이로다.
내세를 믿고 기도하는 이는 봤으나, 관에 천을 덧댄 이는 본 적이 없소. 얼마나 먼 길일지는 모르겠지만 - 물론 애당초에 그 길이 진짜로 존재하는지부터 모르겠지만, 이 문제는 차치하겠소. - 확실한건, 광인은 최소한 그런 안락함을 갖고 方向을 가졌으니, 이 또한, 하나의 벡터가 되어 운동량을 가지게 되었습디다. 생인이나, 강시나, 시체나, 결국 다 갓난아이였던 적이 있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보면 생인이나 강시나 모두 똑같은 존재니, 두려움은 우리의 착시에서 일어남이 분명하오.
또 하나의 작렬하는 불덩이가 스러지고, 광인의 발가락 끝엔 차가움 - 차가움만큼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것 또한 없다오. 겨울 산수유가 빨간 손 위에 한 줌 움켜쥐면, 그만큼 애틋한 마음이 들 수 없는 것과 동치입디다.
그 산수유는 달콤했을 것인가? 그럴 리가. 쓰디 쓴, 가슴이 무너지다 못해 바다에 뿌려지는 증거만큼도 안남는다오. 소주가 감미로운 이유가 여기에 시발점을 두지. 깊어질수록 고통스러워지는 것이 바다보다도 생각 아니겠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지를 치고 기어코 매사를 망쳐버리는, 가증스러운 범죄 아니오. 그런 걸 생각하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원죄에 가까운 것 아닌가? 생각에서 선과 악, 사회, 규율, 그리고 모든 음모들이 출발하잖소. 확대해석이라니, 그런 사회에 만연한 용어를 이 광인의 삶에 은유하다니, 광기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아담과 이브는 존재 자체만으로 인류의 펜이 되었는데, 우리는 진정으로 책을 보기를 경외해야하는 이유지요.
아드레날린이 뇌수를 울리고, 허파가 해수를 울렸으니, 과연 교감신경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그대로 蒸發했을 것이라. 하긴, 전자는 언제나 공허를 부유하니, 그 가설도 아주 틀리진 않은 것이지! 농이라니, 나는 언제나 벤자민 프랭클린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만을 고하기 위해 노력합디다. 아니, 알버트 아인슈타인인가? 사실 그게 누가 되든 상관없지 않겠는가! 그것이 설령 예수의 면전이라 하여도. 진실은 모순과 공존하니, 이것이 관찰 이후에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빅뱅과도 같은 일이오.
얼음을 한 조각 깨문 것처럼, 골이 얼어가는 느낌이었을거요. 마침, 그 때가 연말이었으니, 그가 만약 南반구에 사는 위인이었다면 아마 그나마 덜했을텐데 말이지. 그에게는 날고자 하는 이에게는 질투의 대상인, 아달린조차 없었으니 그의 정신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싸늘해졌을텐데. 또렷한 정신으로 대면하는 광기와의 협상, 광인은 오롯이 중립국만 그의 가슴에 아로새겼네만, 기어코 그 가슴속 깃발은 영원히 심해로 가라앉아버리고 말았다오. 어쩌면 모든 깃발의 이상향은 등대의 정상일지도 모르겠지. 그렇게, 그는 또 다른 미생이 되었습디다.
어떻게 생각하오, 과연 등대가 옮았다고 보는가? 아니지, 아니야. 우리 모두 미생인 것이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찰흙덩이들일 뿐인거지.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욱 흥분되는 일이 아닌가? 정착하지 않는, 그 고결한 영혼이야말로 그 광인에게 일어날 힘을 주었소. 시작은 끝을 맺게 되어 있고, 끝은 또 다른 시작의 한 형태인걸세. 바람 따라가는대로, 민들레씨앗은 하염없이 나그네가 되어가는거요.
미생이 모두 사석이 되진 않지. 그렇다 해도 그것이 완생으로 가는 길은 쉽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소. 광인의 걸음은 그저 끝이 막힌 축이었지만, 혹시 아나. 가끔은 묘수가 평상을 요란하게 만드는 법이라오.
어째 오늘 따라 맨 정신으로 있기 싫은 날입디다. 알콜이 핏속을 돌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모든 것이 선명해지오. 높이가 두렵거든, 애시당초에 날 생각을 하지 말아주시오. 그렇게 떨어진 깃털들이 모여서 또 다른 두려움이 되어 새들을 욕보이는 꼴이 되니까 말이요.
하지만, 날고자 하다 떨어져 죽은 사람들의 시체는 숭고하기 이를 데가 없어 마치 십자가를 보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오. 예수가 광인이라니, 광인과 성인은 정말로 한 끗 차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지혜는 저주일세, 그대여. 현자의 친구는 자애가 아니라 냉소라네. 그리고 그 끝에는 비관과 허무만이 남고 말이야. 무엇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 그대는, 진정으로 생각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견딜 수 있겠소? 니체의 정언이 실로 옮은 것이 회피가 답은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부딪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오. 너무나 단단한 나무는 부러지니 말이요. 비록 줏대없이 흔들리는 갈대가 더 오래 사는 법이지만, 그래도 갈대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니. 아마 그루터기가 나무의 가죽과 같은 것이 될까 싶긴 하네.
친애하는 그대여, 그대는 진심으로 붉은 색의 희열에 중독되지 않길 바라겠네. 아포토시스의 재현은 아나키스트들의 자멸이면 충분하다고 보는 입장이라 말일세. 제발, 그대는. 그대는 광인의 시체를 관조하는 등대지기가 되지 말게나.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진 고깃덩이들이 둥실둥실 깃발로 향하고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되는걸세. 그들도 언젠가는 비가 되어 이 세상에 내릴테고, 그렇게 시체를 파먹는 까마귀가 되는 법이거든. 하이에나같은 비열한 동물과 비교하는 실례는 범하지 말아주게.
이젠, 우리 모두 상승할 시간이오. 굿바이, 다시 굿바이. 비정상이 정상에게, 시체가 생인에게, 까마귀가 유목민에게, 깃발이 등대에게. 굿바이, 영원히 굿바이.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 한이 맺혀 이 깃발에 꽂히고 있구나!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이 결국엔 無로 회귀하나니, 이것이 바로 인간이 만든 상징 중 가장 위대하다는 평등이 자연에 강림한 것입디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굿바이. 세계는 미시적으로든, 거시적으로든 유기적이어서 종말엔 결국 모두가 하나나 다름이 없으니, 지금의 이별을 너무 아 쉬워하지 말아다오, 그대여.
산산이 부서진 내 시체를 박제해주시오. 그것이 나를 향한 소박한 招魂이 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