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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 담론 너머의 가능성

돌봄과 친밀성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한 때

by 이일리



현대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 있어 가장 특징적인 지점 중 하나는 개인의 독립성과 주체성이 인정 받고 강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 않을까. 핵가족 이데올로기가 해체되고 1인 가구가 급증하며 비혼과 비출산의 경향이 확대되는 데에는,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성역화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규범적 믿음의 확산이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눈에 띄는 새로운 담론 중 하나가 ‘K-장녀’ 담론 혹은 밈이다. ‘x’(구 트위터)를 중심으로 한 SNS 뿐만 아니라 언론과 학계에서도 언급되는 K-장녀 담론은 핵가족에 종속되어 장녀로서 헌신하는 삶에 대한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담론으로서, 가족 부양과 돌봄이 장녀를 중심으로 젠더화되어 있다는 데 대한 문제의식과 그로 인한 부담과 억압의 경험을 공유하며 연대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어 왔다.


이은지(2017)의 연구 ‘장녀 됨에 관한 자문화교육기술지: 모녀의 일기를 중심으로’는 어머니의 삶을 조형해온 가족 이데올로기가 딸의 장녀 됨을 재생산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핵가족 내 고정되어 있는 젠더화된 이미지의 억압적 측면을 보여주며,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역시 딸 ‘금명’이 장녀로서 짊어진 부담과 심적 고통을 드러내어 K-장녀 감성을 건드리면서 큰 공감을 사기도 했다. 뭇 한국 여성들이 가족화되고 젠더화된 돌봄 문화 안에 종속되어 왔으며, 그에 따라 여성들이 딸 특히 장녀에 대한 억압과 장녀로서의 부담에 대해 ‘집합적인’ 저항의 정신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보수적인 정치 성향이 강한 대구경북 지역의 청년 여성들을 중심으로 ‘TK장녀’ 담론이 확산되고 있는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의 보수적(혹은 극우적) 정치적 정체성에 제약된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청년, 여성, 소수자, 진보주의자로서의 정치적 정체성과 자율성을 갖고 “TK 콘크리트는 TK의 딸들이 부수겠다”라는 슬로건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는 상당히 긍정적인 변화라 할 것이다. 계층 이동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강한 교육열로 장녀의 성공을 부추기는 압제적인 가족 문화를 비롯하여 폐쇄적인 핵가족 중심의 가족 이데올로기가 지닌 억압성을 벗어나 가족이 아닌 개인이 주체로서 인정 받기 위한 투쟁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K-장녀 담론과 저항은 아직 반쪽 짜리 진전이다. 여성(장녀) 개인이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받는 문제와 별개로, 노인 돌봄과 고독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는 많은 경우에 한국의 페미니즘 담론들이 청년 여성의 당사자성을 중심으로 형성, 확산, 활성화되는 탓에 노인 돌봄의 문제를 충분히 포섭하지 못하는 탓일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탈가족화된 돌봄의 대안을 만들어놓지 못한 채로 가족에 대한 돌봄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어불성설이다. 가족이 아닌 존재가 노인을 돌볼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작은 단위의 자치 공동체의 돌봄 역량이 지금처럼 전무한 채 돌봄의 책임을 가족에게 떠맡긴다면, 아무리 K-장녀의 억울함을 외친다 한들 K-장녀들은 언젠가 다시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페미니즘적 실천을 통합하는 동시에 이러한 실천들을 가로지르는 저 너머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에게 선택으로 주어져 있다고 말해지는 것들이 정말로 선택으로 주어져 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이제 결혼과 출산은 선택이다’라는 말처럼, ‘부모 부양은 이제 의무가 아니다’라는 말 역시 ‘부양함’과 ‘부양하지 않음’이라는 이지선다 바깥을 상상할 수 없게끔 만든다. K-장녀이든 K-장녀의 노부모이든, 홀로 된 개인이 지역사회 안에서 친밀한 관계와 새로운 생활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이지선다 선택지의 협소한 상상력을 넘어서야 가능하다. 성애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관계에서의 느슨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친밀성으로 확장될 때, 위기 대응이나 돌봄은 자연스럽게 가능해질 것이다. 영영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모질고 튼튼한 개인은 없다. 그러므로 다른 어디도 아닌 지금 바로 여기, 내가 거주하는 이 곳에서 서로 기댈 수 있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 맺기가 가능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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