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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라는 구원

박경숙(2017)의 ‘서울과 나고야 노인의 생애사와 가족 변화‘를 읽고

by 이일리



구원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사람들이 자꾸만 미래를 보려고 할 때,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0)은 구원이 과거에 있다고 보았다. 모든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지나간 일들에 있고, 과거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지 못할 때 역사가 파국으로 치닫으며 설명되지 않은 잔해들이 쌓여 새로운 고통이 생겨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벤야민에 따르면 우리가 실패한 까닭은 구원의 가능성이 있었던 순간들마다 동일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간 구원의 가능성의 시점들을 돌아봄으로써 ‘파국으로 가지 않을 가능성’을 발굴해야만 한다. 그는 이러한 구원을 ‘메시아적 구원’이라 명명하면서, 과거를 보게 하고 현재를 폭파시키려는 구원 가능성의 시간을 뜻하는 ‘메시아적 시간’을 미래를 보게 하여 인간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역사적 시간’과 구분하여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초저출산과 초고령화라는 파국적 상황을 구원할 힘은 어디에 있는가. 박경숙(2017)의 논문 ‘서울과 나고야 노인의 생애사와 가족 변화: 근대가족의 탄생과 종언의 생애사적 자취’는 미래에 대한 공허한 예측이 아니라 과거를 살아온 노인의 증언을 통하여 한국 가족변동과 돌봄의 위기를 초래한 이데올로기적, 물질적 기반이 어디에서 유래하였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살핀다. 저자는 노인의 생애사에 배태된 한국과 일본의 근대가족의 특성과 그에 녹아 있는 사회구조의 정치경제적 특성과 집합적인 의식을 추론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일견 비슷한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듯 보이며, 두 국가는 근대가족의 중요한 특징으로 핵가족이 아니라 '직계/부계가족과 부부가족의 혼유 및 절충‘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국의 역사적 맥락과 가족 변동의 전개가 상당히 다른 양상을 하고 있다. “두 사회의 전통적인 가족이념이 상이하고 근대화 과정의 경제·정치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두 가족 이념이 절충되는 방식에서도 유의 하게 차이가 날 수 있다”(8쪽)는 것이 논문에서 강조하는 내용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가족 변동은 일본에 비하여 상당히 정치적이고 갈등적인 역동의 산물이다. “한국사회의 가족 관계 변화는 가족을 국가권력의 기초로 동원하려는 통치권력의 이해, 부계질서의 근간을 유지하려는 가부장의 이해, 그리고 가족 을 여성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려는 이해(利害) 등이 서로 각축하면서 형성된 매우 정치적인 구성물”(9쪽)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내용은, 근대 한국과 일본이 경제적 상황뿐만 아니라 직계 가족 이념이 강화되는 조건, 부부 간 친밀성과 성별분업 관계의 안정성 등에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는 점이다. 나고야 노인들은 ‘이에(家)’ 이념과 부부가족 이념이 절충된 가족관계 속에서 성장했으며, 유소년기엔 제국주의·군국주의 영향 아래 가부장과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고, 여성은 결혼 전후 다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사회화되었다. 고도성장기에는 경제적 안정 덕분에 성별 분업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부부 간 친밀성에 대한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이와 상당히 대조되는 한국 노인의 생애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서울의 노인 세대는 가부장 중심의 권위적인 가족이념 속에서 성장했지만 실제로는 그 물질적 기반이 취약하여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직계·부계 가족관계의 변형을 낳았다. 청년기와 중년기에는 직계·부계가족과 부부가족이 절충되는 양상이 뚜렷해지는데, 성별 분업은 안정되지 못했고 친밀성도 부부보다는 자녀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자녀교육에 대한 헌신은 존재 인정 욕구, 소가족 이념, 지위 상승 기대 등이 복합된 결과였다. 노년기에는 사회 구조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가족관계가 더 혼란스러워지고, 부부관계의 거리감과 자녀 중심의 정체성으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어 고독이 보편화되고 있다. 요컨대 일본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궁핍하였던 20세기 한국은 물질적, 경제적 기반에 의한 세습(즉, 가부장제 안에서 남성의 경제적 기여)이 아니라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이고 혈연적인 규정을 통해 강화된 부계 세습 직계가족 관념이 근대가족의 구성에 더욱 실천적인 영향을 미쳤다.


논문을 통해 알 수 있듯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노인 돌봄의 문제는 개인화나 경제적 불평등 같은 단편적인 요소들로 설명되지 않는, 복합적이고도 정치적인 산물이다. 경제적 궁핍, 직계가족 이데올로기, 그 둘의 괴리, 가부장적인 성차별적 규범, 불안정한 성별 분업에 따른 여성의 독박 노동, 부부 친밀성의 부재 등이 오랜 기간 누적되어온 결과다. 부부 간 친밀성의 형성에 실패하고 자녀로부터의 돌봄을 기대할 수도 없는 오늘날의 한국 노인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새로운 친밀성을 형성해야만 하는 상황에 있다. 농촌의 농민들끼리, 비혼 여성들끼리, 동거하는 연인끼리, 친구끼리 함께 살아가며 새로운 형태의 친밀성을 만들어가는 이들, 특히 노인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단단한 채널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노인 문제의 정책화가 시급하다. 한국 사회는 저출산에 대한 정책적 문제화는 현금성 지원 외에도 일과 가정의 양립 등 여러 차원에서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지만, 고령화에 관한 정책적 문제화의 수준은 기껏해야 기초연금과 같은 시장의 논리에 머물러 있다. 노인들이 새로운 친밀성을 형성하고 지역 공동체 안에서 상호의존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들이 필요하다.


오늘날 노인들이 겪고 있는 친밀성의 문제를 간과한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청년 세대가 이를 똑같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현재 청년 세대는 압축적 성장을 경험한 일명 386세대와 달리 저성장과 각자도생의 국면 속에서 심각한 고용 불안정과 빈곤, 그리고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다. 이는 경제적 궁핍과 가족 이데올로기의 괴리 속에서 살아온 한국 노인 세대의 삶이 어떠한 경로로 친밀성의 공백을 만들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현재와 다른 듯 닮은 과거다. 그러나 한국의 가족과 인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은 벤야민적인 관점에서 찾을 수 없다. 벤야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카발라 유대신학에 있어서 구원은 ‘종말’에 있다. 이러한 벤야민 사상의 치명적인 한계는 구원이 오로지 폐허의 잿더미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봄으로써 역설적으로 파멸을 기다리게 되는 논리로 귀결된다는 데에 있다. 세계가 풍비박산 나야만 새로운 것을 쌓을 수 있다는 파괴적 관점이 반영된 벤야민적 구원으로는 한국 인구의 미래를 위한 발전적이고 생산적인 논의로 나아갈 수 없다. 인구는 파멸 이후에는 결코 재건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합계 출산율이 1명에 한참 못 미치는 한국은, 과거-지나간 생애-를 돌아봄으로써 그 미래-앞으로의 생애-를 건설적으로 쌓아가야만 한다. 우리가 친밀성의 형성에 실패하게 된 이유,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과잉된 이유, 노인 돌봄 공백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이유, 젠더 갈등을 경험하는 이유를 ‘과거’로부터 발견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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