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압축적 제도주의적 근대화를 넘어
장경섭(2021)의 「가족, 국가, 실행적 자유주의 - 제도교본적 사회(과)학을 넘어」는 해방 이후 한국의 ‘제도주의적 근대화’가 사실상 국제 권력 구조에 종속된 자유주의 제도의 이식이었음을 지적한다. 한국의 대미의존적 근대화는 미국식 사회과학을 서구 제도 사용 지침 수준에 머물게 하거나 권력의 도구로 전용하게 했고, 시민사회에서는 가족주의가 외래적 자유주의의 착근을 도왔으며, 국가 차원에서는 자유주의가 반시민사회적 방식으로 개발자유주의화되었다. 이러한 (시민의) 가족자유주의와 (국가의) 개발자유주의의 기능적 정합성은, 위기 상황에서 사회경제적 위험이 가족에 전가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초저출산, 자살률, 만혼, 가족해체 등으로 나타난다. 결국 서구 지향적 제도 근대화는 한국 현실에 맞는 문제 해결 능력이 부족했으며, 이에 대해 제도적 근대화와는 별도의 대응을 시도하면서 한국은 자유주의의 형식과 실행이 이원화되는 인식론적 혼란이 발생했다.
장경섭(2017)의 「Compressed Modernity in South Korea」는 ‘압축적 근대성’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의 근대화 양상과 조건을 설명한다. 급속한 사회 변화 속에서 한국인은 노동과 학업에 몰두하며 생존과 발전을 추구했으나 그 결과는 수많은 사회적 불균형으로 나타났고, 이는 서구 근대성 소화 과정에서의 문제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압축적 근대성이란 시공간적으로 응축된 사회 변화가 다양한 이질적 요소와 공존하는 복합적인 문명적 조건을 의미한다. 이는 국가경제, 농촌, 이차조직, 가족, 개인 등 다양한 단위에서 나타났으며, 냉전, 내전, 국가주도 발전, 종속적 세계화 같은 역사적 조건에 기반한다. 이러한 압축적 근대성은 한국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점점 보편화되는 현상이며, ‘세계시민화된 성찰적 근대성’은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을 새로운 압축적 근대성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전자의 글은 근대화의 방법으로서 한국이 실행한 제도주의적 근대화의 맹점을 논하고 후자는 근대화의 시공간적 양상으로서의 압축적 근대성이 지닌 복잡성을 논한다는 차이가 있으나, 두 글 모두 한국의 발전주의적인 근대화와 압축적 성장의 과정에서 ‘서구적’ 근대성이 인위적으로 삽입되고 소화되며 어떠한 모순과 딜레마들을 떠안게 되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탈식민적 시민사회의 주체성이 결여되고 국가 발전의 목적에 종속된 제도적·압축적 근대화 과정이 (두 논문에서 언급되는) 가족 해체, 자살, 낮은 직업 만족도, 안전 문제 등 다양한 문제적 현상들을 초래한 점과 관련하여, ‘한국적인’ 사회 문제들의 가장 근본적인 기원이 무엇인가 하는 매우 상투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한국 사회가 ‘탈자본화된’ 노동의 의미를 구축하지 못해온 것이 가장 결정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1990년대 이후 나타난 후기근대적 전환이라는 흐름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울리히 벡, 앤서니 기든스, 지그문트 바우만은, 20세기 후반의 세계가 근대 초기와 상당히 다른 것으로서 구분되는 동시에, 근대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벡과 기든스는 20세기 후반의 당대 사회를 ‘후기 근대’, ‘성찰적(reflexive) 근대’, ‘2차근대’, ‘고도근대’로 명명함으로써 초기 근대와 지금의 시대를 구분하면서도 양자의 연속성을 논의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특히 성찰적 근대화란, 근대성의 결과가 근대성의 전개 그 자체에 하나의 문제로서 급진화되어 나타나는 과정을 일컫는다. 근대성의 진전이 근대성이 이룩한 모든 것들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는 역설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후기 근대 사회에 와서는 근대사회가 근대 사회 자기 자신을 문제화하는 재귀적 성찰이 요구된다는 것이 벡의 성찰적 근대화 논의의 요지다.
이를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에 ‘성찰적’으로 비추어보면, 노동의 의미와 가치, 혹은 노동자성 자체가 자본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성장해온 결과가 현재의 대기업 취업난, 비정규직 양산, 하청업체 노동자 착취, 플랫폼 노동자 안전 문제, 돌봄 공백, 감정노동의 일상화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후기 근대 사회는 스스로의 기반이 되었던 근대성의 논리를 성찰하고 해체할 것을 요구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근대적 발전주의와 자본 중심적 사회구조에 광범위하게 또 깊이 포섭되어 있다. 특히 노동자성은 여전히 자본과 결부된 존재로만 규정되며, ‘좋은 일자리’는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 그 자체의 의미나 공동체적 가치를 재구성하려는 사회적 상상력은 부재한 실정이다. 결과적으로, 성찰적 근대화가 요구하는 자기 재구성과 가치 전환은 노동의 영역에서는 사실상 좌초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성찰적 전환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바로 노동이 삶의 수단을 넘는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 구조, 곧 노동의 자본화, 성과화, 경쟁화 그 자체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 형성, 사회적 소속감, 심리적 안정감에 연관되어,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의 시민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한다. 탈식민적 시민사회가 부재하다는 비판은 결국 자율성과 주체성의 상실, 다시 말해 노동자 시민의 부재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러한 진단은 단순히 ‘더 나은 복지’나 ‘더 나은 일자리’ 요구를 넘어, 노동의 의미 그 자체를 재정의하고 노동자 시민이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을 모색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는 생산성이나 효율성의 관점에서 벗어난 ‘쓸모 없음’의 가치, 돌봄과 협동의 사회적 재평가, 그리고 노동의 정치화—즉, 노동을 단순히 개인의 생계 수단이 아닌 사회적 관계 맺기의 핵심으로 보는 전환—을 포함할 것이다. 후기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성찰적 전환은, 이러한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 참고 문헌
- 장경섭. (2021). 가족, 국가, 실행적 자유주의: 제도교본적 사회(과)학을 넘어. 사회와 역사, 132, 435–448.
- Chang, K.-S. (2016). Compressed modernity in South Korea: Constitutive dimensions, manifesting units, and historical conditions. In Y. Kim (Ed.), Routledge handbook of Korean culture and society (pp. 31–47). Routledge.
- Chang, K.-S. (2017). Reflexive modernization. In B. S. Turner, K.-S. Chang, et al. (Eds.), Wiley Blackwell encyclopedia of social theory. Wiley Black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