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성 속에서 주체적으로 다시 사유하기
역사사회학 연구의 관점과 의의에 대하여 박경숙 선생님은 근 100년 안에 발생한 사건들만으로는 근현대 사회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근현대사는 더 먼 과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하셨다. 서구 중심 언어의 범람, 사회 운동 실천 지향적 언어의 폭주 속에서 근대와 전근대를 가르는 판단을 중지하고, 어떠한 현상, 제도, 이념, 문화 등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 어떤 맥락 속에서 변형을 겪었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요컨대 역사사회학적 관점에서 ‘역사성’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러한 관점을 접하며, 역사사회학은 단순히 하나의 사회학 하위 분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이 견지해야 할 기초적인 관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근대’에 대한 재사유는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요구되는 핵심적 사유의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라는 시대 구분에 대하여 인문사회과학 학술장 내에서조차 공통의 인식적 합의가 이뤄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근대라는 용어는 여전히 확정적이고 분명한 개념인 양 상투적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와 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의 구분은 상당히 논쟁적이며 불확정적인 만큼, 근대 개념의 모호함과 긴장에 정면으로 마주하여 ‘근대란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가 근대라고 칭하는 시기는 전근대 및 현대 사회와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이해 및 비판적 논의들을 탐색해보았다. 근대라는 시대 구분은 하나의 자연적인 시점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변화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개념으로서, 어떻게 근대를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시작 지점과 핵심 요소가 달라진다. 기존 인문사회과학 학술장 내에서 근대에 대한 규정은 많은 경우 유럽 중심의 역사관에 기초해 있다. 서양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종교개혁, 대항해시대, 산업혁명, 시민혁명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중세와 구분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보고 이를 근대(modern age)라 이른다. 정치적으로는 절대왕정 체제로부터 국민국가의 등장, 경제적으로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자본주의로의 전환, 사회적으로는 신분제 사회에서 법적으로 평등한 시민사회로의 전환, 사상적으로는 신 중심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합리주의로의 이행, 그리고 기술과 과학의 면에서의 혁명적 발전 등을 특징으로 한다. 서구 사회이론에서의 근대는 ‘근대성(modernity)’ 개념을 중심으로 보다 구조적, 개념적으로 구성된다. 베버는 근대를 합리화, 세속화, 관료제의 발전으로 특징지었으며,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등장으로, 뒤르켐은 분업의 발전과 사회 통합 방식의 변화로, 푸코는 권력 작동 방식의 전환으로 근대를 특징짓는다. 베버 논의의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는 ‘근대’를 현실 그대로의 역사적 시기라기보다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추상적 개념(이념형)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근대 자체를 문제화 하는 이론적 관점들도 존재하는데, 특히 포스트구조주의, 비판이론, 탈식민주의, 역사사회학, 과학사회학 계열에서 이러한 비판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들은 ‘근대’가 보편적 진보를 의미하는 것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지배 권력, 식민주의, 남성 중심성 등을 정당화한 개념이라고 비판한다. ‘근대’가 단절적 혁명이라기보다는 연속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근대’라는 구분 자체의 자의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예컨대 푸코는 근대를 단절 혹은 진보의 서사가 아닌 ‘권력 작동 방식의 재조정’, ‘지속적 변화 속에서의 통치성과 권력의 재조직화’라 보았다. 과학사회학자 브루노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 근대와 전근대,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등의 이분법이 근대적 사유방식이 만들어낸 허구이며, 근대인은 ‘자연과 사회를 분리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혼종(hybrids)’을 만들어내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백신, 환경문제, 테크놀로지 등은 자연/사회, 인간/비인간을 분리해서는 설명이 불가하다. 따라서 근대는 단절의 시대가 아니라 스스로를 신화화한 자기 서사라는 것이 라투르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 ‘근대’는 단순한 연대 구분이 아니라 어떤 세계관, 권력 구조, 생산 방식, 주체성이 형성되는 일련의 질적 전환을 가리킨다. 역사는 항상 해석의 산물이기에 같은 시기를 두고도 어떤 기준을 중심에 두느냐에 따라 ‘근대’의 정의가 달라진다. 한국사나 동아시아 맥락에서의 근대는 서구화된 언어와 개념이 삽입되어 있으면서도 서구의 근대와는 상이하게, 제국주의 침탈과 식민지화, 근대 국가의 강제적 형성, 식민지 근대성 논쟁 등 고유한 맥락을 지닌다. 한국의 경우 보통 개항(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또는 갑오개혁(1894년) 등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지만, 1800년대 말 조선에 자생력이 없던 시점에 타 문명을 통해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 자체로 타율적인 규정일 수 있다. 조선 사회가 외부의 압력을 통해 근대화라는 발전의 단계로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타 문명을 차별하고 식민화하는 함의를 갖는 담론이라는 점에서 한국 근대 규정은 그 자체로 타자화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나 파르타 차테르지(Partha Chatterjee) 등의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은 근대가 서구 중심의 시간성에 기반해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서구는 자신을 근대로, 비서구는 전근대로 설정해놓고, 비서구는 반드시 서구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오히려 근대는 자율적이지 않았고, 식민성과 얽힌 강제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것이 근대 개념에 대한 탈식민주의 이론적 관점이다. 특히 차크라바르티는 "근대를 보편적 보편성(universal universality)으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이론적 폭력"이라고 비판한다.
근대 개념에 대한 엄밀하고 성찰적인 재정의 혹은 정의하지 않음을 위해 다양한 논의들을 살펴 보았다. 이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께서 강조하셨듯 근대를 이야기할 때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의 역사와 단절되었거나 서구 중심의 논리에 치우친 담론은 한국 사회의 복합적인 현실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여기 우리의 역사성과 맥락 속에서 근대를 사유하고, 그를 통해 한국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고유한 학문적 관점이 더욱 힘을 얻어야 한다. 근대란 결코 객관적인 시대 구분이 아니라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개입된 역사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근대를 단절의 지점으로 설정하고 그 틀 안에서만 사회를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 현실에 대한 인식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근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시간성은 그 자체로 특정한 방향성을 강제하며, 비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주변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나 수입된 이론에 의존하기보다 우리의 경험과 현실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해석의 언어와 사유의 틀이 필요하다. 근대를 다시 사유한다는 것은 단지 과거의 구분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현재를 다른 눈으로 보고, 미래를 구성하는 방법을 다시 묻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