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샤(2017)의 <과학철학>과 부르디외 장 이론을 바탕으로
Samir Okasha(2017)의 글은 ‘어떤 것을 과학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과학이라 일컫는 모든 것들만이 공유하는 본질적 성격은 존재하는가?’를 과학철학적 관점에서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다양한 답변들을 논한다. 흥미로웠던 것은 어떠한 학자의 이론이나 관점, 추론 방법 등이 갖는 강점과 사례를 설명한 뒤 그에 따르는 한계 또는 설명되지 못하는 지점들을 논하고, 다시 꼬리를 물듯 또 다른 이론이나 관점, 추론 방법 등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글이 전개된다는 점이었다. 개별 관점들의 한계가 충돌, 조응, 결합하면서 보다 더 온전한 수준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더 나은 과학 이론이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부르디외의 학술장 개념을 통해 과학장 내의 경합과 발전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field) 이론의 창시자 부르디외는 학술 영역에서의 '상징투쟁'에 대하여 ‘장 안에서 더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받는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 그리하여 ‘장 내 상징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라 설명한다. 여기서 학술장은 성원들의 위치가 상징자본의 소유량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되어 있는 공간이며, “장의 자율성이 높다는 것은 장 내 성원들이 문제시된 주제에 대하여 독점적이고 배타적으로 더 나은 답을 제공하려는 상징투쟁에 몰입하고 있음을”(이시윤, 2022) 가리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장 내 성원들은 문제화된 주제에 대하여 (그것이 과학자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는 하등 의미 없는 대상이라 할지라도) 지극히 진지하게, 집합적으로, 집중적으로 몰입한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자율성을 지닌 학술장에 해당한다. 예컨대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려운 물리 법칙에 대한 이해를 구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갈릴레이는 등속도 낙하 이론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역학 이론을 논박하였고, 뉴턴은 만유인력의 원리와 운동 법칙을 발견하여 뉴턴주의의 시대를 열었으며, 아인슈타인은 뉴턴주의 시대 이후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혁명적인 발전을 추동하였다. 장 외부인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장 내의 내깃물로 삼는 학술장 성원들의 연속적이고도 끈질긴 몰입, 부르디외적으로 말하면 학술장 성원들의 집단적 오인을 뜻하는 ‘일루지오(illusio)’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장임을 알 수 있다. 부르디외 장 이론을 바탕으로 인문사회과학 학술장의 낮은 자율성을 비판하는 이시윤(2022)은, ‘객관성’의 핵심이 “공동의 일루지오를 공유하면서 동일한 대상을 연구할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이해관심을 달리 하는 이들과 함께 싸우면서도 또한 더 나은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내부에서 서로 경쟁하는 이율배반적인 관계를 적극적으로 형성하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나는 이러한 학술장의 자율성 문제가 곧 학술장 내 지적 대화의 ‘연속성’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이론이나 주제에 대하여 개별 학자들이 더 나은 답을 내고자 이를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고, 그러한 지적 연구와 토론이 계승되며 학술장 내의 연속적인 지적 대화의 발자취가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그리고 애당초 완전한 새로움이란 없으므로 당연하다. Okasha(2017)의 글을 통해 과학의 혁명적인 발전의 역사를 따라가며 신기했던 것은 일련의 과학사가 하나의 ‘개연적인 스토리’로 읽힌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 지구와 태양의 위치만을 바꾸어 설명했기 때문에 지닌 여러 가지 한계들을 바탕으로 케플러와 갈릴레이는 더욱 정밀해진 천체 관측 결과를 통해 그의 이론을 수정, 보완하며 천문학 역사를 써나갔다.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천문학은 천문학자들의 서로 다른 주장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맥락을 형성하며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단 하나 그 자체로 완성될 수 있었던 탐구와 이론은 없었으며, 탐구와 이론의 축적이 새로운 탐구와 이론을 창조한 것이다. 그런데 인문사회과학 학술장의, 특히 사회학 학술장의 역사를 되짚어도 이처럼 선명한 개연성이 발견될까?
양차 대전이나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몰락, 신자유주의 체제의 부상과 같은 굵직한 역사적이고 사회정치적인 조건들에 의해 학술장 내 성원들의 관심이 전적으로 좌우되며 새로운 이론의 폐기와 발명이 부추겨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장처럼 특정한 사조나 이론의 구체적인 ‘내용’에, 그러니까 이론적 논리성과 모순과 정합성과 가치에 대하여 사회학장 내 성원들이 끈덕지게 달라붙으며, 또 이에 경합하고 반박하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고 비판하며 일련의 개연적인 사회학의 역사를 만들어온 적이 있던가? 사회사상사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사회학의 역사에서는, 특히 그중에서도 한국의 사회학사에서는, 학술장 내 지적 대화의 연속성이 뚜렷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2000년대에 이르러, 그리고 내가 사회학 학술장 내의 일원이 된 2025년 지금 체감하는 바로는 그러한 ‘단절’의 심각성을 지극하게 통감한다. 한국의 사회학 학술장 내에서, 다른 연구자들과의 적대적 공동체를 형성해 보다 발전된 학술장을 만들어 가는 기획의 가능성이 그리 선명하지 않다는 거다. 사회학 연구자들이 입버릇 혹은 자조로 ‘사회학 앞에 00만 붙여서 00사회학이라 할 수 있다’라든가, ‘사회학은 워낙 넓은 범위의 학문’이라 말하곤 하지만, 애초에 그 ‘탈중심성’이 정말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본질인가? 사회학의 낮은 자율성을 두고, 사회학이 탈중심화되어있는 넓은 범위의 학문 분야인 탓을 하는 것이 맞을까? 사회학이 사회‘과’학의 한 분야라면, ‘너도 맞고 나도 맞아’가 가능한 비과학적 학문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회학 학술장은 극도로 파편화되어있는 작금의 상태에 대한 방치와 자조를 넘어 근본적이고 치열한 성찰과 집합적인 변화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 참고문헌
- Okasha, S. (2017). 과학철학 (김미선 역). 교유서가.
- 이시윤. (2022). 하버마스 스캔들. 파이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