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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조이 Aug 28. 2020

남보다 못한 나의 - 이름



모든 것엔 이름이 있다.


사람에게도, 동식물에게도. 하다못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에게도 '돌맹이'이란 이름이 존재한다. 그러니 나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내 이름은 그냥 지은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애정을 가득 담아 만들어 줬다. 손녀에 대한 사랑으로 손자들만 사용한다던 돌림자까지 넣어줬었다. 원래라면 허용되지 않았지만, 막내아들의 첫 아이였던 나만은 예외였다. 갓난 손녀를 매일같이 안고 계시던 분다운 처사였다.


하지만 뭐든 넘치면 탈을 불러일으킨다고. 할아버지의 애정은 그 정도가 너무 과한 나머지, 손녀의 이름을 어딜 가나 눈에 띄게 만들어버렸다. 어느 정도로 특이한 정도냐면 이름을 말하면, 사람들이 "진짜 이름이 그거라고?"라 되물어볼 정도였다. 글을 위하여 편하게 얘기하고 싶지만, 아는 사람들이 볼까 적지는 못 하겠다. 너무 특이해서 동창들이 알아볼 것 같아 그렇다.





90년대엔 부모들이 자기 자식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유행했다. 덕분에 특이한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꽤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내 이름은 가장 눈에 띄었다. 사람이 사물의 이름을 갖고 있어 그랬다. 툭하면 친구들이 이름을 언급하며 놀렸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어딜 가던지 주눅 들었다. 이름을 부르는 발표 시간을 가장 싫어했다.


성정이 활발하거나, 당돌했다면 오히려 자랑스러워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타고나길 그릇이 작은 사람이었다. 어딜 가나 기가 잘 죽는 소극적인 어린애였다. 짓궂은 친구들이 이름으로 놀려댈 때면 반박 한 번 못하고 돌아서서 눈물 찔끔 흘리는 게 전부였다.


이렇게 되니 특이한 이름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이름이 너무 싫어 다른 아이의 이름을 빌려 쓰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매일 밤마다 기도했다. 이름이 평범해지고 싶다는 내용으로. 어렸던 나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탓일까? 정성이 갸륵하면 하늘이 감동한다던데. 이런 간절함을 신이 알아준 건지, 아홉 살이 될 무렵 나는 내가 선택한 두 번째 이름을 갖게 됐다. 이번엔 조금 많이 흔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새로 갖게 된 이름은 어린 내겐 퍽 남의 것 같았다. 이질적이었다. 쓰다가 돌려줘야 할, 임시적인 이름인 듯했다. 하지만 그 이름을 갖고 이십 년을 넘게 살아왔으니 이제는 온전히 내 것이 맞다. 맞긴 맞는데……


사실 아직도, 여전히 남의 이름 같다. 내 이름임에도 남의 것 같다. 사실 내 인생 전체가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것 같이 느껴진다. 이십 대 중반인 지금도 이따금씩 이부자리에 누울 때면 의심한다. 내가 누군가의 삶 전체를 빌려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어릴 적부터 끊임없이 한 의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의미 없는 의심이며, 근거 없는 허상임을 안다. 이런 상상은 모두 병증이다. 자아가 강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로살아가야 하는데, 내가 나를 너무 '남'처럼 여겨서 이렇게 된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곰곰하게 생각해봐도 갈피가 잡히질 않는다. 십 년 넘게 추론한 끝에 이제야 내리게 된 결론은, 내가 나의 근본이라 볼 수 있던 이름을 부정했던 것이 이 길고 긴 '자기부정'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내 전부가 아닌, 인생에 주는 영향이 미미할 정도인 내 '이름' 하나도 사랑해주지 못한 내가, 나 자신 내 전체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나를 내가 아닌 남처럼 대하며 어렵게 지내왔다.


그렇기에 가끔씩은 후회한다. 그 특이한 이름을 사랑해봤다면 어땠을까. 이름을 바꾸자며 작명소에서 받아온 이름을 줄줄 읊던 엄마에게 당시 이름을 계속 가지고 가겠노라 고집을 부렸다면, 지금은 어땠을까. 내가 나를 좀 더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내가 나로서 온전하게 살 수 있었을까?


첫 이름을 미워하고, 스스로 정한 두 번째 이름마저 타인의 것처럼 대해 온 날들을 생각하면 당시의 어린 선택이 아쉽긴 하다. 나는 그 이후로도 남인 나와 친해지지 못했으니까. 덕분에 원치 않는, 제 3자인 남이 할 법한 선택만 하면서 살아왔으니, 이름을 바꾼 날이 참 아쉽다.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고, 나에게도 내 것이라 불릴 만한 것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내겐 남 보다 못한 이름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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