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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터진마돈나 Aug 31. 2023

오마카세를 먹으면 나도 자존감이 조금 올라갈까요?

그들만의 세상이란 건 어쩌면 내가 정해놓은 편견일지도 몰라.

셰프님이 쥐어주는 초밥을 공손히 받아먹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여긴 감질나게 한 개씩만 만들어서 손님이랑 밀당하는 게 컨셉인가?


내가 처음 오마카세란 것을 접했을 때의 기억이다.


열댓 평 남짓한 내부에는 흔히 다찌라고 표현되는 긴 bar형태의 테이블이 있었고, 조금만 귀를 세우면 옆 사람의 대화에 동참할 수 있을 정도로 다닥다닥 의자가 놓여있었다.

안내받은 자리로 다가가자 bar 맞은편에 새하얀 조리복을 입고 서 계시던 셰프님이 두 손을 공손이 모은 채 깔끔하게 정돈된 눈썹을 움직이며 나를 맞이해 주셨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던 나는 셰프님과 마주 보고 앉아 그분이 초밥을 또 언제쯤 내어주시려나 멀뚱멀뚱 구경하면서 "나 이런 곳은 처음이요~~"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세상에 나올 때부터 상위 1%의 먹성과 식탐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먹는 것에 욕심이 남달랐다. 어렸을 적 엄마가 과일을 사다 놓으면 제일 먼저 일어나 꾸벅꾸벅 졸면서도  손가락샛노래질 때까지 귤 한 봉지를  먹어치웠다고 한다. 사다 놓기가 무섭게 언니나 동생의 몫까지 해치워 버리는 나 때문에 엄마는 언젠가부터 저녁에 사다 놓은 간식거리를 찬장이나 옷장에 숨겨놓았다. 딸 셋 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중간에 끼어 경쟁 속에 자랐고, 하필이면 공부보다 먹는 것에 집중된 본능이 나를 대단한 먹보로 성장시켰다.

어른이 되어서도 잔칫상처럼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려진 음식을 보면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동자는 다음 순서의 음식을 정하느라 늘 바삐 움직였다. 먹을 때 말 시키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을뿐더러 음식 먹으면서 수다 떠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나인데,

내 앞에 덩그러니 놓인 초라한 스시 한 점이라니.

그마저 입안에 넣고 나면 한참을 기다려야 내 차례가 되어 또 한 점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이 무슨.

그렇게 셰프님이 한점 한점 내어주는 것을 받아먹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눈꺼풀은 뻑~뻑 천근만근 무거워져 흘러내린다.

배가 진짜로 부른 건지 기다림에 피곤한 감정이 더해져 배가 부른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먹다 보니 그만 먹고 집에 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누가 데리고 와준대도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이런 젠장.

또다시 오고 말았다.

두 번째라고 나름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던 모습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어색함이 취향이나 형편에 맞지 않는 내심에서 저절로 표출된다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끼 식사로 인당 15만 원에서 25만 원이나 지불해야 하는 가격이 주는 위화감이 나를 더 주눅 들게 한다는 것 또  알고 있었다.

내 형편에 내 지갑에서 그 돈을 주고 사 먹을 일은 만무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또 여기 올 일은 없겠지'


나는 세 번째 오마카세를 맛보면서 스스로 큰 착각 속에 빠져버렸다.

정적이고 단정한 공간 안에서 프라이빗한 대접을 받고 있는 손님들 사이 끼어있다 보니 내가 바라본 프레임 속 그들처럼 나도 그들에겐 고급스러운 손님으로 비치겠지?

나는 그들처럼 보이기 위해 힐끔힐끔 그들의 행동훔쳐보다가 슬그머니  따라 했다. 가끔씩 셰프님께 맛있다는 표현을 하기도 하면서 속으론, '오케이 꽤나 자연스러웠어'라고 생각했으니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 분위기에 어우러지고 싶어 아등바등 나대던 꼴이 참 구차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스스로 그들 화 되려고 애쓰던 게 나 피곤했는지 나는 또 생각했다.

'아~~ 역시 나하고는 맞지 않아.'

차라리 솥뚜껑 위에서 치이익~ 잘 구워진 삼겹살과 돼지기름을 덮은 묵은 김치를 깻잎 위에 넉넉히 얹고 밥 한 젓가락과 마늘고추를 쌈장에 푹 찍어 한입 터지게 구겨 넣은 다음 소주 한잔을 입안에 털어버리면 그곳이 바로 내 세상이었을 텐데.. 난 왜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고 남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러고 있나.




네 번째 오마카세를 먹던 날 나는 드디어 완벽하게 그들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시를 앵콜스시때 또박또박 주문했고 배가 부를 때면 샤리의 양 조절을 부탁할 줄도 알았다. 때론 같이 간 일행에게 오늘은 적초가 많이 들어가서 간이 좀 쎄네 어쩌네 하며 제법 아는 척도 했다.

내가 처음 오마카세를 접했을 때처럼 어딘가 신삥의 느낌이 물씬 나는 손님이 보이면 괜스레 우쭐해지기도 했다. 마치 신입사원에게 업무지시를 내리는 팀장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쭈그리 같았던 예전 내 모습은 온대 간대 사라지고 자존감이 키만큼 커버린 걸 느낄 수 있었다.

포르쉐를 타는 사람들이 느끼는 하차감이나 롤렉스를 차는 사람들의 손목이 유난히 빛나보이는 것처럼 나 역시 그 안에서는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특권층이나 누릴법한 우월감에 빠져 그들이라도 된 것 같은 기시감마저 들었다.

만원의 밥상에 행복해하던 나는 어느새 십만 원의 행복을 알아버렸고 백화점 회전초밥의 골드접시가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버렸다.




나이가 제법 들고 이젠 나도 마음만 먹으면 한 달에 한 번쯤은 지갑을 열고 오마카세를 먹으러 갈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그런데 희한하다.

예전 마음먹어도 쉽게 갈 수 없었을 때 느꼈던 그 우월감을 이젠 느낄 수 없었다.

오마카세를 먹을 때 올라갔던 2시간 남짓의 자존감도 이젠 시들해졌다. 왜일까..

물가가 오른 것처럼 10만 원의 행복이 어느새 50만 원의 행복으로 바뀐 걸까? 

생각해 보니

숙하지 않은 것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주눅이 들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그리고 그것에 조금 익숙해질 때쯤 나는 서서히 자존감이 높아진다.

그리고 그 익숙함이 일상이 되어버리면 나의 자존감도 다시 일상적인 감정들에 섞여 묻히게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에르메스 백을 들었다고 한들 스스로 그것이 나에게 과하다고 느껴진다면 자존감이 높아지긴커녕 설마 사람들이 짝퉁으로 보는 건 아니겠지?라고 오히려 스스로 더 위축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자존감은 오마카세를 먹어서가 아니라 그 분위기에 내가 잘 동화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올라갔던 것이다.

내가 가끔 쭈구리가 된 것처럼 자존감이 확 떨어졌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주변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하고 스스로를 외롭게 할 때 많이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처음 오마카세를 먹었을 때 오히려 자존감이 확 떨어졌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스스로 위축되지 않고 품위를 지키고자 할 때 나의 자존감이 올라간다는 것을 네 번째 오마카세를 먹으며 그제야 깨달았다.



만약 당신이 오마카세를 처음 접했을 때 나처럼 쭈구리가 되지만 않는다면,
셰프님의 특별한 스시와 더불어 두 시간 동안 훌쩍 키가 커진 자존감을 덤으로 먹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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