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06
금요일이다. 오전 근무를 마친다. 고려대학교 이공계 캠퍼스를 가로지른다. 내리막을 딛는다. 터덜터덜 걷는다. 날이 흐리다. 부슬비가 내린다. 추적추적하다. 목구멍이 따끔거린다. 구역감이 오른다. 위염이 도진다. 처서와 동시에 막을 내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어릴 적, 찌는 여름에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고온이 식도에 해롭다 배운다. 속이 시려도 차갑게 시킨다. 카페인 끊어야 건강하다. 쉽지 않다. 마땅한 음료가 없다. 차를 주문하자니 돈이 아깝다. 우유나 두유가 들어가면 배부르다. 결국 도돌이표. 위장아, 잘 가라.
짐을 전부 챙긴 줄 알았다. 의기양양했다. 귀마개를 빠뜨렸다. 충전하지 않고도 소음을 차단할 필수품인데. 무선 이어폰은 없다. 이렇게 말하면 대체로, ‘아직도’가 붙는다. 필요한 때 줄 이어폰을 쓴다. 무척 낡았다. 정전기가 일어난다. 지지직거린다. 번거롭다. 무엇을 구태여 듣지 않아도 무방하다. 궁금한 소리가 없다. 담고 싶은 음악이 없다. 청각을 잃어도 괜찮으리라, 착각한다. 함부로 오만하다.
귀를 닫고 속을 듣는다. 깊숙이 박힌 심리를 끄집는다. 어리숙한 자신이 싫다. 초보인 상태가 지겹다. 그만 미숙하고 싶다. 업무로 성취하길 갈망한 때도 있었다. 전공만 바라보고 달리던 시절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면, 중간고사를 마치면, 학기를 종강하면, 국가고시를 통과하면, 약사가 되면, 병원에 합격하면. 연이은 과업을 성취한다. 바라던 가운을 입는다. 꾸준히 윽박에 노출된다. 어지간히 핀잔한다. 선임 한숨에 하루하루 깎인다. 반들반들 닳는다.
무수한 가정법 이후는 어떠한가. 편평하다. 납작하다. 마시멜로를 잔뜩 쌓았는데. 곳간 넉넉히 채웠는데. 삼킬 위장 없는 지금이다. 주디스를 떠올린다. 부천에서 처음 만난 주디스. 달리를 취재하는 주디스. 또렷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주디스. 자신을 소개하는 주디스. 약사로 일했다는 주디스. 아주 다른 일로 돈을 벌고 싶은데. 면허 말고 밥벌이할 여력은 없어서. 이유도 변화도 없이 그대로, 그냥. 치열과 나태가 섞인 회색인을 스케치한다. 자화상이 나온다. 채색할 미래를 소망한다. 현재를 방황했던 과거로 언급할 언젠가를.
240302
1. 이유도 없고 변화도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 그냥!
2. 치열함과 나태함을 적절히 섞어 놓은 회색인이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