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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현의 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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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혜 Oct 02. 2024

잠이 더디고 이불을 덮으면

240913

연휴를 앞둔다. 환자가 몰린다. 역대급 진상을 마주한다. 차오르는 보름달만큼 지랄이 풍년이다. 건장한 삼십 대 남성이다. 처방전 접수 때부터 급한 티를 낸다. 조제약이 투약구로 나온다. 국장님은 검수한다. 환자는 빨리 달라며 낚아챈다. 다른 사람 약이다. 눈 뜨고 약 베인다. 국장님이 환자에게 전화한다. 수화기 너머로 고함이 울린다. 약을 똑바로 안 주면 어떡하냐. 왜 자기 탓을 하냐. 임신했으면 다냐. 국장님은 곧 산달이다. 내달 출산 예정이다. 상체가 고꾸라진다. 신음한다. 눈앞에 대기하는 환자가 열 명 남짓이다. 소란하다. 웅성거린다. 뒤쪽은 약 바구니 쌓이는 소리가 들린다. 갑작스러운 출산인가? 벌써 낳으시면 곤란한데? 기절하는 줄 안다. 만감이 교차한다. 황급히 전화를 넘겨받는다. 여전히 가시 돋친 말투다. 아까 전화받은 사람 어디 갔냐. 노발대발한다. 급기야 쏘아붙인다. 얼굴도 좆같이 생긴 것들이. 우와. 투시력이 좋으시다. 안경에 마스크 착용한 약사들 얼굴은 어떻게 확인하고. 얼굴과 일이 무슨 상관이지. 신기한 사고방식이다. 요즘은 얼굴에 침 맞는 상황이 생기면 그저 웃는다. 훌륭한 소재다. 놀라워라. 역시 세상은 다양해.


주소를 부른다. 광화문 인근 빌딩이다. 장소로 오란다. 상세 건물을 묻는다. 표독스레 답한다. 제가 왜 알려줘야 하나요.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요. 그냥 오시라고요. 주차 타워 뒤쪽이요. 예정보다 일찍 퇴근한다. 약을 챙긴다. 지정한 장소로 간다. 차를 몰고 나타난다. 문을 세게 닫는다. 하차한다. 도끼눈을 뜬다. 그 임신한 약사는 왜 안 나왔나요.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아세요? 만약 약이 바뀌어서 잘못 먹었으면 얼마나 큰일이 생겼겠어요. 일 똑바로 하세요. 음. 일부러 약을 바꿔 드린 것도 아니고, 제대로 확인 전에 본인이 잘못 가져간 주제에 왜 말을 얹을까. 희한한 심보야. 속으로 생각한다. 원래 받을 약을 건넨다. 다른 환자 약을 돌려받으려 집는다. 비닐을 뺏듯이 낚아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말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고는 확. 봉투를 머리 위로 쳐든다. 칠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한다. 오호. 이런 사람이 데이트 폭력으로 뉴스에 나오는구나. 멀쩡한 회사원 행세하니 소름 끼친다. 오랜만에 신체 위협을 겪는다. 교감 신경이 흥분한다. 맥박이 빨라진다. 가라앉지 않는다.


국장님께 연락한다. 답장이 온다. 문자에 미안한 심정이 뚝뚝 떨어진다. 무엇보다 임산부 건강이 염려된다. 전화한다. 혈압이 높다고 하신다. 심호흡 계속하고 세 번 측정해도 150/110 정도라고. 임신성 고혈압 위험을 잘 안다. 달이 차기 전에 제왕절개술 시행할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걱정이다. 앞으로는 진상이 오면 그저 납작 엎드려야 하나, 미심쩍은 결론짓는다. 약국 칼부림 사건이 떠오른다, 대한민국이 총기 소유 국가였다면 우리는 오늘 죽었겠다, 말한다. 퉤퉤. 번복한다. 액땜한다. 무섭다. 태권도 1 단이 무슨 소용인가.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면 같은 일을 겪었을까. 회의가 짙다. 국장님이 답한다. 분노조절장애는 병이라서 사람을 가리지 않아요. 덩치가 작아서, 여자라서, 약사라서 일어난 일이 아닐지 몰라요. 건장한 남자 의사도 같은 폭풍을 겪는다는 후기를 들었어요. 무서운 세상이다. 심신을 안정해야 한다. 평소 비싸서 군침만 흘리는 연어 덮밥을 먹는다. 국장님이 주신 카드로 결제한다. 심박수가 잦아든다.


이대로 귀가는 애매하다. 매트리스에 몸을 누이기까지 정신이 붕 뜬다. 마침 카메라와 노트북이 함께다. 서순라길로 걷는다. 단골 펍에 들어간다. 사장님은 눈썹을 치켜올린다. 어제 왔던 각설이 오늘 또 왔네, 표정이다. 글을 쓴다. 하이볼을 마신다. 곤두선 신경이 부드러워진다. <현의 혜석> 막바지다. 끝이 보이니 싱숭생숭하다. 차기작을 구상한다. 무얼 써야 좋을까. 매일 짓기는 어렵다. 주간 연재로 타협해야지. 호흡을 가다듬는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이불 속에 읽기 좋은 책을 고심한다. 당신은 권여선 <각각의 계절>을 골랐나. 나는 어느 책을 읽어도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잠이 솔솔 든다. 이탈리아 여행 전부터 챙긴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은 아직도 머리맡 부근이다. 떼야 하는데. 상권 초반부에서 진도 나갈 기미가 요원하다. 곤란하다. 잔을 비우고 노트북을 닫으면. 잠이 더디고 이불을 덮으면. 채무처럼 페이지를 탕감하겠다.


240309
1. 잠이 오지 않는 밤 이불 속에서 읽기 좋은 책은 뭐지?
2. 각각의 계절 - 권여선
3. 친절하고 부드럽고 예의 바른 친구는? 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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