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약빤극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혜 Aug 09. 2021

약빤극장 불이 꺼지고

프롤로그

약대생은 왜 글을 쓰기 시작했나


나는 한 놈만 패.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대사다. 한 번쯤 들어봤으리라. 나 역시 한 놈을 1년 동안 팬 적 있다. 약학대학 4학년 때다. 4학년 과목 꽃은 약물학이라 단언한 시절이었다. 수업 진도는 폭주 기관차였다. 분량에 비해 학점은 턱없이 작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과목은 제쳐뒀다. 한 해 약물학 공부에 전념했다. 단순히 멋을 위해서였다. 애석하게도 흥미와 성과는 비례하지 않았다. 내 성적은 두들겨 맞았다. 한 가지는 얻었다. 직업병이라 할까.


영화에 약물명이 나오면 메모부터 한다.


 영화를 좋아해 틈날 때 몰아 본다. 방학은 영화 성수기고, 시험 기간은 영화 비수기다. OTT(Over The Top) 서비스가 발달한 21세기 안성맞춤 관람법이다. 암막 커튼을 친다. 노트북을 세운다. 빈백에 기댄다. 나른한 시간이 기껍다. 힘 빼고 보는 영상에 익숙한 용어가 들린다. 스페이스 바를 누른다. 흐름이 끊긴다. 어쩔 수 없다. 메모하지 않으면 뒤 내용 집중을 못 한다. 영화 제목과 약물 이름을 적는다. 고민한다. 왜 저 약물을 썼을까? 42초가 지난다. 재생한다. 몹쓸 버릇이 들었다.


 영화 평론을 쓴 글이 아니다. 전공자가 아닐뿐더러 영화 마니아라고 칭하기 부끄럽다. 아직 못 본 명작이 많다. 머리는 거장 서사를 따라가기 부족하다. 작품 전체를 해석한다거나, 감독 철학을 파악할 자신은 없다. 자기소개 취미란에 '영화 감상' 따위를 끄적일 수준이다. 약물을 소상히 설명하려는 글도 아니다. 약사 면허 잉크가 찍히지 않은 학부생이다. 자세한 정보는 전공서나 인터넷이 잘 알고 있을 터이다. 약물 작용기전이나 대사 과정은 지겹게 공부했다. 본인이 글을 쓸 때 지루하면 읽는 사람은 오죽할까. 즐겁게 쓰고 싶었다.


 글이 약대생 친구의 가벼운 조잘거림 정도로 다가가면 좋겠다. 나는 당신 옆좌석에 앉는다. 우리는 나란히 화면을 본다. 함께 상영관을 빠져나온다. 근처 카페에 들어간다. 견해를 나눈다. 둘은 관점이 다르다. 당신은 내게 없는 지식을 가졌다. 내가 발견 못한 부분을 본다. 나는 다른 데 초점을 맞췄다. 약물이 영화를 어떻게 이끄는지 관찰했다. 따뜻한 디카페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화두를 던진다.

지난 수업에서 이 약물을 배웠는데,
방금 본 영화에 나왔지 뭐야.
신기하지 않니?

 감상을 나누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약빤극장에 당신을 초대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