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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혜 Aug 09. 2021

페놀은 죄가 없어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속 소독약

이종필. 한국. 2020

1.
이자영은 삼진 그룹 생산관리 3부 말단 사원이다. 상무님 짐을 정리하러 담당 공장에 간다. 그녀는 방에서 방치된 금붕어를 발견한다. 금붕어를 풀어주려 강가에 간다. 물고기 떼가 죽어있다. 공장에서 폐수가 쏟아져 나온다.

2.
자영은 마을 사람들에게 폐수 유출 건 합의서를 받아야 한다. 공장 부근을 다시 방문한다. 과수원에 한 남자가 있다. 자영이 말을 건다.
— 옥주 공장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폐수처리시설이 고장 나서 극소량의 페놀(Phenol)이...... 심려 끼쳐 드린 점 회사 대신해서 사과드립니다.
자영은 고개를 숙인다. 자영 눈에 썩은 사과가 보인다. 과수원에 있던 남자는 피부를 긁는다.

3.
자영은 후배와 옥주 마을에 외근을 간다. 부동산에 들어간다. 임산부가 말한다.
— 제가요, 조산기가 있어 큰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소변에서 페놀이 나왔대요.



 인간은 과거를 추억하는 존재다. '그때가 좋았지'라며 향수에 젖는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그때'를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담는다. 비 온 뒤 밤길, 골목 물웅덩이에 반사된 가로등, 오렌지색 빛 번짐. 전화 부스 안 옹기종기 모인 친구들, 짤그랑거리며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 안달복달하는 대화. 한껏 치솟은 갈매기 눈썹, 잘 말아 올린 앞머리 뽕, 버건디 풀 립, 복사뼈 위를 스치는 코트. 브라운 톤 레트로 감성이 유쾌하다.


 영화는 사회 문제 전반을 지적한다. 여성인권, 노동권, 환경권 보호를 이야기한다. 고상하고 단단한 서사다. 1995년 가상 회사 삼진 전자가 배경이다. 세 주인공이 등장한다. 자영, 유나, 보람이다. 셋은 고졸 출신으로 인사고과에 제외되었다. 어느 날 회사는 공고문을 붙인다. 토익 성적 600점 이상인 사람에게 대리 진급 기회가 생긴다. 유니폼을 입은 말단 여사원은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에서 함께 공부한다.

 





삼진 그룹 옥주 공장 페놀 유출 사건


 자영은 잔심부름하러 공장에 간다. 검은 폐수가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목격한다. 회사는 기관에 의뢰해 성분 검사를 진행한다. 페놀 농도는 1.98mg/L다. 기준치인 3mg/L보다 적은 양이다. 회사는 마을 사람에게 소정의 위로금을 준다. 자영은 마을에 간다. 회사를 대표해 합의서를 받기 위함이다. 페놀이 기준치 이하로 안전하다고 설명한다. 자영이 마을을 둘러본다.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물고기가 폐사했다. 고장 명물인 사과가 썩어있다. 개 피부가 벗겨졌다. 목덜미를 긁는 노인, 코피가 흐른 아이, 구역질하는 주민이 눈에 띈다. 임산부 소변에 페놀이 검출된다.

페놀이 함유된 폐수가 쏟아진다.


 삼진 그룹은 두 가지 부정을 저질렀다. 첫째, 공장은 6개월간 페놀 325톤을 방류했다. 둘째, 본사는 사실을 알고도 검사서를 조작하여 은폐했다. 실제 페놀은 488mg/L가 검출되었다. 기준치 대비 163배가량 높은 값이다. 삼진 그룹은 잘못을 덮으려 했다. 2천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말이다.



페놀 측 변론 1, 저는 최초의 소독약입니다


 보람은 페놀이 뭐냐고 묻는다. 자영이 답한다.

회로 기판 만들 때 사용하는 화학물질인데,
소각 처리하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한 거래.

 페놀은 영화 내내 독극물로 등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페놀 입장도 들어 봐야 한다. 페놀은 최초의 의료용 소독약이었다.


 조셉 리스터(Joseph Lister, 1827~1912)는 페놀을 이용한 무균 수술법(Aseptic surgery)을 개발하였다. 리스터는 영국 외과 의사였다. 수술실 환경이 청결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수술받은 환자가 감염으로 사망하곤 했다. 리스터는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가 쓴 논문을 읽었다. 감염 원인이 미생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내용이었다. 리스터는 수술 상처에 미생물 감염을 막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하수구를 청소할 때 페놀을 쓰던 때였다. 냄새 제거를 위해서였다. 리스터는 페놀이 장티푸스균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페놀 용액을 환부 소독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드레싱에 페놀을 적셨다. 상처에 덮었다. 금방 아물었다. 감염이 일어나지 않았다. 수술 후 사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리스터는 1867년 의학저널 란셋(The Lancet)에 논문을 발표했다. 페놀을 이용해 수술실을 소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술에 청결이 당연한 시대가 열렸다.



페놀 측 변론 2, 정로환을 보세요


 페놀은 유기화합물 합성에 시작 물질로 쓰인다. 페놀로부터 만들어진 유도체를 페놀류(Phenolics)라 부른다. 예로부터 약으로 쓰인 페놀류가 있다. 크레오소트(Creosote)라는 물질이다. 크레오소트는 페놀류 10종 정도가 섞인 혼합물이다. 살균력이 강해 장 속 세균을 죽인다. 배탈과 설사를 멈추게 한다. 과거 서양 사람들은 크레오소트를 민간 의료용으로 사용했다. 너도밤나무를 태웠다. 목타르(wood tar)가 남았다. 목타르를 증류했다. 유분층이 남았다. 정제했다. 크레오소트를 추출했다. 크레오소트 50g, 글리세린 5g, 감초 가루 적당량으로 환약 1,000알을 만들 수 있었다. 크레오소트 환은 '정로환'의 유래가 되었다.


 정로환은 1902년 일본에서 개발된 지사제다. 초기 명칭은 '크레오소트 정'이었다. 크레오소트는 러일전쟁(1904~1905) 동안 군인을 도왔다. 일본은 승전 후 '러시아를 정벌한 약'이라는 뜻을 담아 제품명을 지었다. 정벌할 정(征)을 썼다. 정로환(征露丸)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약이 한국에 들어오고 한자를 바를 정(正)으로 바꿨다. 정로환(正露丸)은 1972년부터 한국에서 판매되었다. 정로환이 쓰이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마땅한 설사 치료제가 없었다. 배앓이로 고생한 사람이 많았다. 정로환은 항문이 흘린 눈물을 닦았다.



비극에도 복고가 유행인지


 명예로운 기간은 짧았다. 페놀은 독성으로 물의를 빚었다. 영화가 바탕한 실화다. 1991년 낙동강에 페놀이 유출되었다. 2011년 비극은 반복되었다. 안전성 홍보부터 실험 보고서 조작까지, 20년 전을 모방한 듯 기승전결이 유사하다. 주인공만 바뀌었다. 페놀이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다.


 가습기 살균제란 살균 목적으로 가습기 분무액에 첨가하는 물질이다. 종류로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 C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 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이 있다. 가습기 살균제는 처음에 공산품으로 분류되었다. 호흡기 흡입 독성에 대한 안전성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판매되었다. 사건이 발생했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사람들이 폐 질환으로 사망했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는 2011년 8월 가습기 살균제를 폐 질환 원인으로 추정했다.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다. 기업 잘못으로 민간은 피해를 보았다. 건강상 장해를 얻었다. 개인이 기업을 상대하기는 버겁다. 대기업은 '치밀하고 꼼꼼'하다. 영화가 수면 위로 끌어올린 90년대와 다를 바 없다. 복고가 20년을 주기로 돈다는 말이 있다. 비극이 유행 항목 중 하나라면, 2011년에 찾아온 레트로는 사절이다.



누가 죄인인가


 페놀은 세포막을 파괴해 항균작용을 한다. 생물은 세포를 단위로 한다. 세포는 세포막을 갖는다. 페놀은 미생물만 죽이지 않는다. 생물을 죽인다. 페놀은 현재 유해 화학물질로 분류되었다. 의학적 용도로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인체 투여는 고사하고, 무단 폐기도 큰 잘못이다.


 페놀을 소독약으로 쓴 2세기 전에도 부작용은 있었다. 의사와 환자에서 발진이 나타났다. 그래도 페놀 고마운 줄 알았다. 수술 전후 감염증을 예방했다. 유도체를 합성해 배탈을 멎게 했다. 이틀 앓을 병을 하루만 앓았다. 목숨을 빚졌다. 1991년 페놀, 2011년 가습기 살균제가 '죄인'인가? 아니다. 화학물질은 죄가 없다. 죄는 인간이 짓는다. 영화를 전부 본 뒤 페놀은 억울해하지 않을까. 사람이 어찌 그리 쉽게 변하냐며 슬퍼할지 모르겠다.






 봉현철 부장이 보람에게 말한다.

원래 회사라는 데가 그래.
항상 손해가 덜한 쪽을 선택하지.

 회사는 여전히 손해가 덜한 쪽을 택한다. 영화와 현실은 시간제한 여부가 다르다. 영화는 정의를 2시간 안에 구현한다. 러닝타임 동안 사과, 보상, 마을 재생까지 일사천리다. 현실에서 정의는 요원하다. 몇십 년이 지나도 찾기 힘들다.


 우리는 영화 바깥을 산다. 히어로 역은 버겁다. 부당에 맞서고, 세상과 싸우고, 극적 성취를 얻어야만 가치 있는 삶은 아닐 테다. 개미는 똑똑해져야 한다. 치밀하고 꼼꼼한 녀석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런던 스모그, 옥주 마을 페놀, 가습기 살균제 뒤에 있다. 숨은 실체를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다음은 별 거 없다. 밟힌 지렁이 곁에서 꿈틀거리는 수밖에. 꿈틀거림은 선한 영향을 미치리라. 영화가 우리를 정의로 벅차게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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