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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혜 Aug 09. 2021

그녀 이야기 속 살바르산

<허스토리> 속 항세균제

민규동. 한국. 2017

1.
순모는 배정길 할머니 아들이다. 순모가 발작을 일으킨다. 머리에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에 몸서리친다. 의사는 순모에게 뇌매독 진단을 내린다. 의사가 정길에게 말한다.
— 뇌매독이 쉽게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서른 넘어서 발병한 거라, 재수가 없는 케이스인데. 어머님한테 증상이 없는 것, 그게 대단한 겁니다. 경과 좀 봅시다.

2.
난징의 폐허. 문정숙 사장은 정길이 증언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정길은 친구 금복과 위안부 피해자로 있을 때를 회상한다.
— 군인들은 칸칸이 방을 만들고, 여기가 우리가 들어갈 방이었다. 군인들을 따라서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래도 금복이랑은 한 번도 안 떨어졌다. 안 그랬으면 나는 진즉에 죽었을 거다.
 나중에는 하도 힘들어서, 성병에 걸리면 군인을 안 받을 수 있을까 싶어, 금복이랑 짜고 군인한테 삿쿠를 안 끼우고 했다. 그랬더니 아래에서 버러지 같은 것이 나오더라.
 주사를 놔줘. 살바르산(Salvarsan) 주사라고 매독 주사다. 그거를 맞으면 입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 혈관에 잘못 놓으면 썩어. 그래도 나는 멀쩡했는데, 금복이 팔은 시꺼멓게 썩어 들어갔다. 가망이 없으면 쏴 죽여 버리니까, 살려고, 살려고, 제 살점을 떼어달라고 하더라. 아주 이를 악물고서.



 이제까지 역사(history)는 남성 역사(his story)가 중심이었다. <허스토리>는 여성 역사(her story)에 귀 기울여 달라고 외친다.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가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가 된 원고 3명, 여자 정신 근로령으로 일본 공장에 동원된 근로정신대 원고 7명. 총 10명의 원고단이 일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재판을 했다. '관부재판'이라 불렀다.


 할머니들은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23번 재판을 하며 일본 재판부에 맞섰다. 함께 싸워나간 이야기를 그렸다. 신파로 빠지기 쉬운 주제를 담담한 서사로 풀어냈다. 김해숙(배정길 할머니 역) 배우님 연기가 명치끝에 남았다. 북받치는 슬픔을 절제한 듯했다. 감정을 누르는 억지스러움은 없었다. 단지 모든 진이 빠져버린 모양새였다. 그녀는 더 화낼 기력조차 없었다. 참담함이 피부에 닿아 오래 머물렀다.






매독에 걸린 아들


 영화 초반, 순모는 뇌매독(뇌신경 매독) 진단을 받는다. 뇌매독은 매독 중에서 가장 심각한 단계다. 매독은 매독균(Treponema pallidum)에 의해 발생하는 성병이다. 매독균은 스피로헤타(spirochete)과에 속한다.


 성행위로 매독균이 인체에 침입한다. 1기 매독이다. 성기에 둥글고 단단한 궤양과 몽우리가 생긴다. 2기에 균은 혈액에 침투하고 전신으로 퍼진다. 발진이 나타난다. 순모는 발진 때문에 뺨이 붉다. 3기가 되면 균이 장기를 침범한다. 얼굴, 뼈, 근육에 혹이 생긴다. 말기에 뇌와 신경마저 침범하면 신경 매독이 된다. 마비성 치매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순모는 이 단계에 해당한다. 의사는 정길을 대단히 여긴다. 순모는 어머니로부터 매독균을 물려받았는데, 정작 정길은 매독을 앓지 않기 때문이다. 임신한 어머니가 매독에 걸렸을 경우, 아이도 보통 매독에 걸린 채 태어난다. 선천 매독이라 한다.


 매독은 오랜 난치병이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언급했듯, 소독약은 미생물 침입을 막을 수 있다. 그뿐이다. 체내에 들어온 균을 죽이지 못한다. 매독을 치료하려면 몸속에 퍼진 세균을 죽여야 했다. 매독 치료제의 등장은 획기적이었다.



살바르산을 맞은 두 소녀


 위안부 당시 정길과 금복은 삿쿠(일제강점기 군용 콘돔) 없이 성폭행당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차라리 성병에 걸리는 게 나으리라 생각했을까. 정길은 살바르산 주사를 맞았다.

정길은 난징 폐허에서 살바르산 주사를 회상한다.


 살바르산은 매독 치료제다. 일본군은 정길에게 약물을 오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길의 증언은 그녀가 매독에 걸리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성기에서 버러지가 나오는 증상은 기생충 감염증에 가깝다. 매독균은 세균이다. 너무 작아 육안 관찰이 불가하다. 매독에 걸렸다고 벌레가 나오지도 않는다.


 매독에 걸리지 않은 어머니 정길과 선천 매독인 아들 순모. 모순된 관계는 복선이 된다.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영화를 직접 보길 바란다. 퍼즐이 딱 들어맞는 쾌감을 느꼈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마법 탄환 등장


 살바르산은 비소화합물이다. 독일 과학자 폴 에얼리히(Paul Ehrlich, 1854~1915)가 '마법의 탄환' 개념을 도입하여 개발했다. 마법의 탄환이란 선택적 독성을 가지는 항균 화학요법제를 칭한다.


 에얼리히는 색소가 세포를 특이적으로 염색하는 현상을 관찰하였다. 그는 관찰에 착안하여 '감염균만 죽이고 사람에게 해가 없는 약물'을 만들고자 했다. 에얼리히는 비소(As)를 사용하여 여러 화합물을 합성했다. 화합물 중 606번째로 합성한 아르스페나민(Arsphenamine)이 매독 치료에 극적인 효과를 보였다. 아르스페나민은 임상실험을 통하여 살바르산이라는 제품명으로 발매되었다. '606 주사', '살바르산 606'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살바르산을 마법의 탄환으로 칭하나 비소는 여전히 인체에 해로웠다. 비소는 뼈와 피부에 축적된다. 간에 만성 독성을 일으킨다. 피부 과색소 침착, 손바닥 각질화가 나타난다. 영화 속 금복 팔은 비소 독성으로 썩어 들어갔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팔에는 살바르산 주사로 인한 흠집이 아직 남아있다.*



욕망을 비춘 거울


 살바르산 개발 전, 중세 유럽 사람들은 매독 치료에 수은(Hg)을 썼다. 훈증 요법을 이용했다. 아궁이에 진사(황화수은, HgS)가 담긴 그릇을 넣고 불을 지핀다. 진사는 공기 중 연소 시 황과 수은으로 분리된다. 발생한 수은 증기를 환자 몸에 찜질한다. 피부와 호흡기를 통해 수은이 감염 부위에 스며든다. 수은은 매독균을 죽인다. 치료는 매독 자체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상당한 후유증을 남겼다.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도 수은 증기를 쐬었다. 일본군은 살바르산 주사를 맞아도 차도가 없는 환자에게 훈증 요법을 썼다. 소녀는 이불을 덮어쓴 채 목만 내놓고 아래에 수은 김을 쐬었다.* 과거를 재조명할 때 살바르산 부작용을 문제 삼는 사람이 많다. 절반만 맞다. 금속 비소 자체는 수은보다 독성이 강하나 살바르산은 엄연한 약물이다. 금속 수은보다 해롭지 않다.


 수은은 만성 노출 시 혈관-뇌 장벽을 통과해 중추 신경계 장애를 일으킨다. 신장 및 신경독성 등 인체 중독 현상을 유발한다. 수은 증기는 액체 상태보다 유독하다. 중세 수은 치료 환자는 침을 엄청나게 쏟아내어 탈수와 갈증에 시달렸다. 지독한 입냄새가 났다. 잇몸이 문드러졌다. 이와 머리카락이 빠졌다. 소녀의 증상도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일본군이 과연 독성을 몰라서 수은 증기를 쐬도록 했을까? 중세시대는 다른 매독 치료제가 없었다. 수은을 치료에 활용한 것은 옳고 그름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20세기는 이야기가 다르다. 저급한 욕망이 드러나는 행위다.



매독 치료제 현 위치


 살바르산은 1940년대부터 페니실린(Penicillin)으로 대체되었다. 1929년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은 논문을 냈다. 푸른곰팡이(Penicillium notatum)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포도상구균을 배양하던 페트리 접시에 우연히 포자가 날아온 일화는 유명하다. 플레밍은 푸른곰팡이가 번식한 부분에 균이 자라지 않은 것을 보았다. 그는 항균물질을 분리하려 했다. 시도는 실패했다. 불안정한 구조가 쉽게 분해되었기 때문이다.


 페니실린은 베타 락탐 고리(β-lactam ring)를 가진다. 독특한 사각형 고리는 항생작용에 핵심이나, 상당히 불안정하다. 분리 및 대량생산이 어려웠다. 하워드 플로리(Howard Florey, 1898~1968)와 언스트 체인(Ernst Chain, 1906~1979)은 페니실린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약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페니실린이 가장 안정한 pH와 온도를 발견했다. 안정한 조건에서 불순물로부터 페니실린을 정제할 수 있었다.


 페니실린은 세균 세포벽 합성을 방해한다. 세포벽이 약해진 세균은 외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죽는다. 세포벽 특이적 작용기전은 사람에게 부작용을 줄였다. 인간 세포는 세포벽이 없기 때문이다. 페니실린은 구조 내 금속원소를 포함하지 않는다. 수은이나 비소와 같은 금속 독성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 진정 마법의 탄환에 가까운 약물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에 완벽이란 없었다. 알레르기 등 부작용이 알려졌다. 그럼에도 페니실린 개발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페니실린은 새 지평을 열었다. 인류는 세균 감염에서 한층 자유로워졌고 평균수명이 늘었다. 다양한 항생제가 베타 락탐 구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일본군 위안부 당시 페니실린이 보편적이었다면 어떨까.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이미 일어났다. 과거를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어두운 상자 속 바늘구멍 하나 찾듯 상상할 뿐이다.

페니실린을 썼다면 애꿎은 금복 팔이 살바르산 주사로 썩지 않았겠지.
소녀 팔에 생채기가 하나 정도는 줄었겠지.


 피해자는 상처 받은 자신을 봐 달라 외치지 않는다.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폭력을 폭로할 뿐이다. 앞으로도 그녀 목소리를 담은 영화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 계속 소리치면 좋겠다. 진정성 있는 사과와 보상이 당연한 미래가 오기를 바란다.




* 동북아 역사넷, 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이옥선, "그 역사를, 첫감에 부끄러워서 얘기를 똑똑하게 못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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