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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혜 Dec 06. 2023

Day 8 산 넘고 물 건너 그림 구경

화가 알폰스 무하가 18년 동안 그려낸 '슬라브족 서사시' 감상

어떤 그림은 완성될 때부터 특별한 운명, 혹은 사명을 가진다.

체코 출신 화가 알폰스 무하가 그린 '슬라브족 서사시' 20편 연작 시리즈 작품도 그럴 것이다.

알폰스 무하는 1860년에 체코 모라비아 지방에서 태어나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림을 그렸던 미술 천재 였다고 한다. 부유하지 못했던 탓에 엘리트 코스를 밟지 못했고 심지어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서도 떨어졌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배우고 그리다가 프랑스 연극 스타인 사라가 자신의 포스터를 긴급하게 수정해달라는 요청에 무하가 동원되면서 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졌고, 포스터가 붙여지자 대중은 새로움과 아름다움에 열광했다. 그렇게 유명화가가 된 무하가 가장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인 작품은, 그의 민족인 슬라브족의 역사를 그린 '슬라브족 서사시' 20편 연작이었다.  


체코로 여행지를 결정하고 여행 코스를 짜면서 이 슬라브족 서사시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대작들은 수도 프라하에 있는게 아니라 모랍스키 크룸로프라는 외딴 성에 전시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예 이 그림을 보러가는 여정으로 코스를 짜면 되지. 모랍스키 크룸로프 성은 브르노에서도 기차와 버스를 갈아 타야 도착할 수 있다기에 오직 이 그림들을 보러 가려고 브르노 2박을 예약! 그런데 이 모든 루트는 구글 지도에 의존한 것이라 구글 지도가 틀렸다면 이 그림을 못 볼 수도 있는 거고 하루를 날려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워낙 발길 닿기 어려운 곳이라 가이드북에도 없었다.) 완벽한 지도가 없는 상태에서의 여행.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한 번 떠나보자는 생각으로 새벽 5시에 일어났다.


6시 기차를 타러 브르노 역에 갔는데 생각보다 이 새벽에 떠나는 사람들이 많네. 그리고 통근열차 같은 두칸 짜리 열차를 타고 모랍스키 역으로 출발. 기차 안이 따뜻해서 긴장이 좀 풀린다. 어떻게든 되겠지. 근무하러 가시는 듯 작업복을 입은 몇 분의 승객만 있었고 조용했다.

산 넘고 물 건너 그림 보러 가요

40여 분 기차를 타고 모랍스키 크룸로프 역에 내렸다. 신기하게도 내리자마자 성으로 가는 버스가 바로 왔다. 버스 요금 내려고 잔돈을 열심히 만들었는데, 최신식 버스에서는 카드 결제가 되더라. 구름인지 안개인지 하늘은 흐렸지만 버스가 달릴 수록 조금씩 조금씩 더 설레기 시작했다.

버스로 20분 정도 달려서 또 10분 정도 걸으니 드디어 모랍스키 크룸로프 성에 도착했다! 무하의 슬라브 에픽 이라는 표지판을 보니 제대로 찾은 것 같아서 안도했고 어딘가 성이 너무 아담해서 조금 놀랬다. 아 드디어 보는 구나. 하지만 내 조심성 탓에 너무 일찍 출발한 바람에 오픈 1시간 전 도착 ㅠㅠ 성 주변은 한적하고 이 아침에 문 연 가게도 없어서 그냥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래도 괜찮아, 제대로 잘 찾아왔으니까. 다행히 춥진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쳐서 추위를 못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성 앞에서 만난 귀여운 강아지와 할부지
도착을 했습니다


고맙게도 30분 쯤 기다리니 직원 분들이 출근하셔서 오픈 시간 전인데도 문을 열어주셨다.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얌전히 앉아 있으니 이내 티켓 보여달라 하신다. 그렇게 오늘의 첫 관람객으로 입장~

갤러리에 들어서니 일단 거대한 크기의 작품들에 압도되고, 놀라운 색채와 갖가지 상징으로 가득찬 그림에 이걸 어디서부터 봐야할지 마음이 급해졌다. 훌륭한 작품을 마주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보다. 프론트에서 샀던 가이드북을 번역기 돌려 보면서 한 작품 한 작품을 읽어나갔다.

 저 초록문을 지나 2층으로 가면 보물들이 펼쳐진다.
유목민 무리에게 쫓기는 슬라브족을 그린 작품
천장까지 닿을 듯한 크기에 압도된다
약탈을 피해 숨은 슬라브족과
그들을 지키는 수호신 (왼쪽은 전쟁의 상징인 빨간색 옷을 입은 청년/ 오른쪽은 평화의 상징인 희색 옷을 입은 소녀)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얀 후스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있어서 너무 신났다. 나 저기 갔었는데! 프라하에서 체코어로 설교하는 유일한 장소였단다. 그림 구석 구석 주요 인물들이 있기 때문에 집중해서 보고 또 봤다.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얀 후스의 마지막 설교 장면을 그린 작품


설교하는 얀후스와 듣고 있는 군중들
대학교 총장님이기도 했던 얀 후스의 설교를 열심히 필기하며 듣고 있는 학생들
왼쪽부터 소피아 여왕, 검은 옷 입은 자를 노려보는 무하의 아내 마리, 검은 옷을 입고 후스의 설교 내용을 염탐하는 자  
불가리아를 지배하며 슬라브족까지 점령했던 시메온, 예술과 문학을 사랑한 그의 명을 따라 승려들이 문학작품을 필사하고 있다.

무하의 작품에는 그의 심성이 잘 드러난다. 비록 자기 편의 승리일지라도 전쟁에 대해서는 매우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려내며 모든 목숨이 소중하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 승리한 전투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대신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하자는 것이 무하가 전하고 싶은 말이었던 것이다.

12세기 십자군 전쟁 중 왕이 수행원과 함께 승리를 보러왔으나 막대한 희생 앞에 고통으로 얼굴을 가리는 모습
전쟁에서 희생된 생명들
모라비아의 수도에서 슬라브어로 예배 드리는 것이 허락되는 장면
강인함과 결속력을 상징하는 청년의 모습
1346년 부활절에 이루어진 스테판 4세의 대관식을 그려낸 작품

지금이 성수기가 아닌데다가 평일 아침이라 그런지 관람객이 나 밖에 없었기에 그림들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무하가 작품마다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들을 배치해 두어서, 마치 그 인물들이 내게 '너는 이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라고 묻는 것 같았다.

다리가 아픈데 의자가 없어서 그냥 바닥에 앉아서 봤다.
러시아 제국에서 농노제가 폐지되었던 것을 그려낸 작품. 왕궁 뒤로 비치는 태양이 안개를 관통할 것이다.
마지막 작품. 중앙에는 기쁨과 자유의 색인 노란색, 두 팔을 벌려 자유로워졌음을 선언한다. 국가간의 평화를 상징하는 무지개와 슬라브 민족을 축복하는 그리스도의 모습.

무하가 그렸던 포스터 작품들도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상업 미술, 일러스트레이터의 선구자라고 할까?

왼쪽부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낸 작품들
일출과 일몰
달과 별을 형상화한 작품
다 이룬 자의 만족스러운 미소

작품을 마음껏 누리고 밖으로 나오니 소박한 정원이 보인다. 남의 나라 역사 공부를 그것도 그림을 통해서 단시간에 하다보니 머리가 약간 아프기도 한데 기분은 좋다. 산 넘고 물 건너 찾아와 볼 가치가 충분한 전시다.

돌아가는 버스 타는 곳이 올때 내렸던 곳이랑 똑같아서 (상식대로라면 건너편이어야 하는데) 불안한 마음에 지나가는 체코 시민 분에게 여쭤보니 자기도 잘 모르지만 알아봐주겠다고 막 검색을 하시고는 정확하게 가르쳐주셨다. 게다가 버스 타서 내가 기차역으로 간다고 말했는데 기사님이 못 알아들으시자 뒤에서 기다리던 여학생이 체코어로 말해주어서 버스 요금을 낼 수 있었다. 착한 체코 사람들..감사해요!!

다 이뤘으니 브르노로 돌아갑시다

브르노 시내로 돌아오니 오후 1시. 새벽부터 한 끼도 못 먹고 초코바 하나만 달랑 먹었더니 배가 너무 고프다. 배고프니 춥기도 춥다. 체코 어디서나 상향평준화된 베트남 음식점으로 피신하자.

내 영혼까지 뎁혀준 쌀국수! 이젠 고수도 상관없다

먹고나니 정신이 좀 든다. 숙제를 마친 기분으로 여유있게 주변을 구경하다가 너무 예쁜 서점이 있어서 들어가봤다. 이름부터 멋진 Book Therapy.

책 치료를 받고 싶은 사람 
이 어여쁜 표지들로 전시를 해도 되겠다
여행책자가 이렇게 감각적이라니


슈필베르크 성에 올라가서 브르노 시내 전경도 내려다봤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좀 을씨년스럽긴 하다.

낮 2시쯤 인데도 불을 켜야하는 분위기
성 입구에서 만난 조각품. 고개를 파묻고 있는 모습에 문득 괜찮아.. 하고 말해주고 싶었다.
비가 오니 좀 아쉬운 브르노 시내 전경


이번 여행 최대 과제 수행을 자축하는 의미로 디저트도 먹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피곤하긴 한데 이상하게 발걸음은 가볍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따뜻한 인테리어처럼 다정한 직원들
지금 사진을 보니 다른 것도 더 먹었어야 했는데...
하트하트 핫초콜릿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돌아오는 길에 본 도자기 공방
길 모퉁이 작은 꽃집
사람들이 줄 서서 먹던 버블티 가게 (동유럽 사람들 버블티를 좋아하더라)
어딘가 화가 난 것 같은 산타와 초콜릿 가게


새벽부터 시작된 하루가 저물었다.

완벽한 지도가 아니어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천사들을 만나게 하시고

보고싶던 것들을 마음껏 누리게 해주시고

오늘도 무사히 귀가하게 이끄신 최고의 동행,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일도 우리 함께 여행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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