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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혜 Jan 15. 2024

Day 12 여행하는 마음

체스키크룸로프 성, 타보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뚝 그치고 말갛게 씻은 하늘.

겨울 유럽의 좋은 점은 관광객이 많지 않아 한적하다는 것. 사람들에 부대껴 다닐 일이 없어서 좋다. 체스키크룸로프의 아침도 조용한 가운데 가끔 새 소리만 들린다. 조식을 먹으러 내려 갔더니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숙소에 숙박객이 2명 더 있었다, 그것도 한국 분들이! 서로를 보고 놀라워하며 어색한 인사 ;;

주인 아주머니도 처음 뵙는데 인상이 좋으셨다.

한국 여행객은 중년 부부셨는데 짐이 많으셔서 셔틀 밴을 타고 이동하신다고 한다. 신기하게 내가 다녀왔던 오스트리아 빈을 이 분들은 앞으로 가실 예정이고, 내가 갈 예정인 독일 드레스덴을 이미 다녀오셨단다. 그래서 여행 정보를 요모조모 교환했다. 빈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이미 열렸다는 소식에 너무 좋아하셔서 뿌듯했다. 독일 드레스덴 주변에 작센스위스 라는 멋진 등산 코스가 있다고 추천해 주셨는데 내 일정으로는 아무래도 빠듯해 어려울 것 같다.

저 구름 같은 빵은 딱딱하지만 꼬소하고, 크라상은 매우매우 부드러웠다
빵 위에 햄과 치즈를 차곡 차곡 쌓아올려 이불처럼 덮어 먹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나니 어제와 다른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개운한 날씨로, 맛있는 식사로 내 마음을 둥기둥기 해주시는 하나님... 기운차게 어제 못 가본 체스키크룸로프 성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 곳엔 옛날부터 성 입구 계곡 같은 곳에서 곰을 길렀단다. 그 전통으로 지금도 곰을 기르고 있다고 해서 가봤는데 진짜 곰이다! 어딘가 생뚱맞은 서식지이긴 한데 우리가 좁지는 않지만 그래도 안쓰러웠다.

아름다운 주황지붕의 향연
곰 집
어슬렁 곰

성 쪽에서 바라본 체스키크룸로프는 참 동화 속 마을 같다. 착한 사람들만 모여 싸우지도 않고 평화롭게 살 것만 같은.

해시계
가을이 저물었다
보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투석용  돌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니 식물과 어우러져 비밀의 화원 처럼 숨겨져있는 집들을 발견했다. 아주 작은 공간이라도 한 가지 식물이 아니라 여러 종류 꽃들을 모아 연출하는게 참 조화로웠다.

체코 뷰티 브랜드 아포테카의 광고지인데 이렇게 이쁘게 만들어 놓았다
숙소 앞에 있던 극장
체코 스타일 꽃 장식
아주 어릴적 슈퍼에서 팔던 종합과자선물셋트 같은 느낌


이웃 도시 타보르로 이동할 시간이다. 이번에도 청개구리 같은 플릭스버스를 타려고 터미널로 왔다. 터미널엔 오스트리아에서 봤던 유리 책장이 있었다.


한적한 터미널

어제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던 커플과 갈 때도 같은 버스를 탔다. 여행 잘 하셨어요~ 인사하니 역시 정답구나.

같은 국적의 동포란 것은 특별히 많은 말을 하지 않고 한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기분이 든다.

버스가 출발하고 창 밖으로 보이는 초록빛의 향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닮았다

1시간 조금 지나 타보르 터미널에 도착했다. 예약한 숙소까지 걸어가기엔 좀 멀어서 버스를 타려고 터미널에서 버스 티켓을 샀는데 그 티켓이 아니었던가보다. 버스에 타서 그 티켓을 내미니 기사님이 이거 아니라고 내리는 정류장을 말하래서 허겁지겁 구글 지도로 보여드렸다. 정류장에 따라 요금이 달라지나 보다. 또 깊숙히 넣어뒀던 카드를 꺼내는데 잘 안나와서 등에 땀이 다 났다. 왜냐면 내 뒤로 승객들 줄이 엄청 길었기 때문. 그런데도 불평하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들 숨죽이고 나를 기다려주었다. 아, 그 순간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겨우겨우 요금 결제를 하니 기사님이 몇번 째 정거장에서 내리면 되는지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유모차나 캐리어를 갖고 있는 승객들이 앉기 편한 좌석이 있었는데 이미 앉아있던 승객이 날 보더니 황급히 자리를 양보해주셨다. ㅠㅠ 따스한 체코사람들...  

버스에서 내려 내 살림을 가득 담은 캐리어와 배낭을 끌고 메고 걸어가는데 자전거를 탄 틴에이저 한 명이 날 보고 외쳤다. "안녕!" 헛것을 들었나 했는데 분명 안녕 이었다. 아마도 BTS의 영향이 아닐까 싶었다. 4년 전 유럽 여행할 때는 늘상 니하오마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는데 정말 문화의 힘이란 강력하구나.

평화로운 주택가를 지나
숙소에 도착했다.

이번에 예약한 숙소는 주방이 따로 있어서 취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곳이다. 숙박객은 나 혼자 뿐인 것 같다. 주인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주변 마트, 맛집, 기차역까지 가는 길을 설명해주셨다.

이 집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물건들

내가 좋아하는 세모 지붕 방이다. 유럽에서는 드물게 신발 대신 슬리퍼 신고 오는 곳인데다가 티 없이 깔끔했는데, 재밌게도 거미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 여행한 지 오래된 나는 거미마저도 정겨워서 내쫓지 않고 함께 지내고 싶었다. 그 혹은 그녀가 나보다 먼저 이 방에 들어온 셈이니까. 내 짐 속에만 들어가지 말렴. 거미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아늑한 내 방
하늘이 보이는 이런 창문이 제일 좋아요
오늘의 룸메이트

조식 먹은 후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 오늘 여행은 마트 장 봐서 요리해 먹는 것으로! 다이소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 입성. 한식에 굶주린 나는 비행기에서 받은 고추장을 써서 고추장찌개를 해먹고 싶었다.

아주아주 커다란 닭고기와 초대형 페레로로쉐
줄기째 파는 방울토마토와 대파! 파가 있다는 게 너무 반가웠다.
장 다 보니 251코루나, 15,000원 정도다.

지금부터 체코 첫 요리를 시작해본다. 일단 돼지고기는 마늘과 소금 후추로 간을 해놓고, 냄새 잡으려고 커피가루도 넣었다. (이런 것 까지 갖추고 있는 숙소 주방 매우 칭찬)

대파 양파 감자 양송이 썰어놓고

고기 먼저 볶은 다음 나의 사랑 너의 사랑 고추장과 물, 야채 투여하고 바글바글 끓였더니

약간 허여멀건한 고추장찌개가 탄생하였습니다.

고기가 약간 질겼지만 고추장 찌개와 햇반은 여행자의 고된 하루를 충분히 위로해주었다. 장보고 요리 하고 나니 어찌나 피곤한지 먹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룸메이트 거미에게 굿나잇 인사를 하고 침대에 뛰어들어 잠들려는 순간! 날아온 메일 한 통에 잠이 확 달아났다.  

독일 철도청 잊지 않겠다.

아...독일 철도청 악명 높다더니 내 여행에 이렇게 초를 칠 줄이야. 이틀 후 타보르에서 독일 드레스덴으로 기차를 타고 가려고 독일 열차 도이체반을 예약해뒀는데 독일 철도청에서 딱 그날 파업이라 내 예약편도 아예 없어질 수 있다는 경고 메일이다. 휴...일단 너무 졸리니 내일 아침에 해결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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