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회색 지대 인터뷰집
#교사
#5살 아들, 2살 딸
호밀은 휴직 전, 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했었다. 육아를 하는 동안 그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나의 시간을 갖는 일'이었다. 육아에 있어서 가장 힘든 순간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꼽았다.
이전에 [육아회색지대] 제이와의 인터뷰에서도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 확보'는 중요한 키워드였다. 제이와의 인터뷰가 육아의 늪에서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그려냈다면, 오늘 호밀과의 인터뷰는 나를 위한 시간을 어떻게 채우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 나의 시간을 갖는 동안 어떤 것을 하고, 그것이 호밀님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제 시간을 갖는 동안 일기를 쓰거나, 외국어 공부, 책 읽기, 멍 때리기를 해요.
육아는 사실 타인의 욕망에만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일이잖아요. 분명 아이들과 열심히 뭔가를 하면서 주말을 보냈는데 하루가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고 허무한 느낌이 들어요. 나 자신을 위해 책을 읽거나 내가 좋아하는 외국어 공부를 하거나 하면 ‘나를 위한 시간을 가졌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시간을 갖고 나면 애들이 말을 안 듣거나 짜증을 내도 참을 수가 있어요. 아까 내 시간을 가졌으니까 지금은 아이들을 위한 시간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내 숨통이 트이는 일, 내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걸 누릴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건 흔히 말하는 ‘쉰다. 혹은 논다.’는 개념과는 거리가 있어 보여요.
책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배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아이를 낳고 나서 하게 됐고요. 아이를 낳고 나면 제가 쓸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잖아요. 이 짧은 시간 안에 내가 뭘 해야 기분이 좋은지,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 알게 됐던 게 책 읽기와 공부였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화장 못하고 옷 예쁘게 입지 못하는 건 슬프지 않은데 책을 읽을 수 없고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내 삶의 이유를 상실한 것 같은 느낌을 주더라고요.
-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서 오나요?
예전에는 제가 더 높은 학위를 받거나 성취를 이뤄내야만 인정받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원하던 대학에 입학하고 목표한 직업을 가지게 되면서 노력하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이뤄내고 타인의 인정을 받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익혀왔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간낭비 하는 것도 싫어했어요. 당장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선택은 되도록 피하고 효용과 쓸모에 초점을 맞춰 살았어요. 교사생활을 할 때에도 지금 당장 내가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교사연수 등은 흥미가 없었어요. 학생 때도 지금 하고 있는 이 공부가 당장의 합격이나 성적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그간 투자해 온 시간이 모두 무의미해지고 내가 쓸모없는 일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서워질 때가 있었죠.
타인으로부터의 인정, 스스로 효용성 높은 삶을 지향했다는 것을 제외하고 생각해 보자면 저는 공부하는 과정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리 외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자격을 얻는 게 중요하다고 해도 이 과정이 괴로우면 할 수가 없잖아요. 저는 그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동안은 결과만을 보면서 살다 보니까 이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거나 인정받는 행위가 아니더라도 배우는 과정 자체에서 느끼는 재미로 하루를 채워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타인으로부터의 인정, 효용 높은 삶은 육아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아주며 누구보다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아이가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못 먹게 했다는 이유로 하루를 망친 엄마가 된다.
7kg이 넘는 아이를 들쳐 매고 유기농 매장으로 가, 가장 신선해 보이는 채소를 고르고 또 고른다. 아이가 자는 동안 숨소리도 죽여가며 삶고 다지고, 잠에서 깬 아이를 한 팔로 안아 들고 절구로 빻아 만든 이유식은 두 숟갈도 채 먹이지 못한 채 하수구로 향한다.
호밀은 이러한 육아의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육아를 시작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익숙하게 살아왔던 인정받는 효용 높은 삶의 방식이 부정당하는 시간과 마주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칠 수 없는 것들을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찾아내며 그것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냈다.
- 육아로 인해 얻게 된 또 다른 새로운 의미나 변화가 있을까요?
육아하기 전에는 화장 안 하고 밖에 나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었거든요. 여러 개의 원피스와 구두는 필수였죠. 저는 그게 중요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육아를 하는 지금은 원피스 두 벌로 살아요. 육아를 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거예요. 애를 낳고 어쩔 수 없이 화장을 못하게 되고 예전에 입던 원피스도 못 입게 되었는데 오히려 “전혀 안 슬프고 오히려 되게 편한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남들에 보여주고 싶었던 이미지가 있어서 그랬던 거지 내가 정말로 편하고 그 자체를 즐겼던 건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아이를 훈육하면서 배우는 것도 있죠. 최근에 읽었던 글 중에 하나가 ‘감정은 선택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어요. 아이가 오늘 너무 재밌게 놀아서 기뻤지만 마지막에 아이스크림을 못 먹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면, 아쉬운 마음은 보내주고 기쁨을 선택할 수 있게 도와주라는 거예요. 제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도 사실은 명확히 모르는데, 아이를 교육할 때 그런 감정을 읽어줘야 하잖아요. 아이의 감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려고 하다 보니 제가 가진 감정도 보이더라고요. 지난 30여 년의 시간 동안 한 번도 감정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이제야 아이를 키우면서 배워가고 있어요.
아마 복직해서도 조금은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은 아이들이 교우관계로 인해 감정적으로 힘들어하면 ‘그래서 뭘 도와줄까?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니?’를 묻는 선생님이었는데 이제는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육아는 체력전이기도 하지만 극한의 감정노동을 요한다. 실시간으로 나의 감정을 조절해야 하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 필연적으로 나의 어린 시절을 한번 더 살아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를 똑 닮은 아이의 모습에 어쩐지 흠뻑 더 빠져드는 것 같다가도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거울로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면 걱정과 분노가 섞인 모호한 감정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갖게 해 주고,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고 나면 가슴 한켠이 뿌듯해지지만 그 뿌듯함 이전에 ‘나는 안 그랬지만’이라는 조건이 붙는 이상, 어린 시절의 상처 입은 나를 떠올리게 된다.
쓰나미처럼 덮쳐 오는 온갖 감정을 이성적으로 다뤄내야 하는 일,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마주하는 일, 어린 시절 나의 상처와 마주하는 일은 버겁고 불쾌한 감정을 일으켜 외면하게 되거나 자기 연민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한다.
- 호밀님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책임감 있고 성실한 사람이요. 저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고, 제가 가장 잘하는 거고, 앞으로도 저는 그렇게 살 거거든요.
책임감은 제가 선택한 일을 온전히 감당하는 모습을 말해요. 제가 그런 상황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부모님 간병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했을 때, 간병인을 쓸 수도 있지만 딸로서 느끼는 책임감으로 ‘하기 싫다.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고민 끝에 내가 하기로 선택했다면, 그래야 내 마음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한 거예요. ‘책임감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라는 말은 필요하지 않아요. ‘아니, 어쩔 수 없지 않았어.’ 어쨌든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내가 하기로 선택한 거죠. 선택한 이후에 나를 연민하고 자괴감을 느끼는 건 자기 파괴적인 일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책임감은 내가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 이죠.
성실함은 일상을 놓지 않는 것이에요. 책임감을 갖고 살려면 일상이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밥을 먹고, 아이를 돌보는 생활의 영역뿐만 아니라 제가 일상적으로 하기로 마음먹은 일기 쓰기나 공부도 포함돼요. 일상적이고 반복되어야 하는 어떤 일들을 빠뜨리지 않고 무너뜨리지 않고 계속 끈기 있게 해낼 수 있어야 책임감을 갖고 해내야 하는 일들도 버틸 수 있어요.
- 육아는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나요? 책임감이라는 키워드는 육아에 대입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육아와 성실함은 너무 거리가 먼 것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기준을 많이 낮췄어요. 단어를 원래는 매일 10개 정도 외워야 하는데, 5개를 외웠다면 ‘아 그래도 내가 오늘 단어 외우는 일을 빼먹지 않았어. 놓지 않았어’ 정도로 생각하는 거죠. 너무 많은 일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슬퍼지기만 해요. 얼마 전에 일기에도 썼던 이야기인데, 둘째를 키우면서 무용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알게 됐다는 생각도 들어요.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도 너무 귀엽고 좋더라고요. 그동안은 하루를 무용하게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루를 보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내가 불어공부를 1년 하고 그만둘 것도 아니고, 원하던 시험에 떨어지면 내년에 또 보지 뭐, 10년 안에는 붙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내가 내린 결정과 선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책임감, 때로는 버거울 수 있는 그 책임감을 견디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일상을 구성하고 꾸준히 수행해 내는 성실함이 호밀에게 있었다.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삶의 질을 끌어올리려면 먼저 우리가 매일 하는 것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어떤 활동,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사람 옆에서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를 포착해야 한다. 식사시간에 행복을 느낀다든가 여가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동안 곧잘 몰입 경험에 이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확인되는 성향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의외의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실은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뜻밖에도 일하기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TV를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데서 더 큰 즐거움을 맛보았는지도 모르며 혹은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생은 이런 식으로 살라고 누가 정해 놓은 규칙이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이다."
- 일은 호밀 님에게 어떤 의미예요?
저는 일이 ‘세상에 기여하는 나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남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 진짜 좋고 기쁘거든요. 가능하다면 일로서 그 기분을 계속 누리고 싶고 이걸 위해 노력하면서 살고 싶어요.
이 노력을 가족들에게만 쏟아붓고 싶지 않거든요. 아이들은 제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각자 알아서 자기 나름대로 살아갈 텐데 제가 너무 많은 결정권을 행사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내가 보람 있는 일을 알아서 잘하고 아이들은 또 즐거운 일을 찾아 각자 잘 살았으면 좋겠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 일이 중요해요. 만약 로또가 된다 해도 일은 할 것 같아요. 전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하게 되겠죠. 보충수업도 안 해도 되겠네요.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요.
-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삶, 세상에 기여하는 일이 교사로서 호밀님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네요. 교육자로서의 이야기가 조금 더 듣고 싶어요.
저는 교육복지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초등학교를 경제 수준이 낮은 가정이 많은 동네에서 다녔었거든요. 그 동네에서 중학교를 진학하고 1학년 첫 공개수업 때의 일이었는데, 엄마가 공개수업에 참관하셨다가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저를 바로 멀지 않은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셨어요. 공장과 같은 학교의 환경은 둘째치고 공개수업 도중에 아이들이 뒤에서 딱지를 치고 있는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었어요. 저와 친했던 한 친구는 절도로 정학당한 상태였죠. 전학 후의 학교는 훨씬 깨끗하고 안정적인 여중이었어요. 거기서 어떤 친구들이 ‘누구네 언니 외고 갔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너무 멋있다. 대단하다’라는 평가를 받는 걸 보고 ‘외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한번 가봐야겠다.’ 생각했고 그렇게 외고에 진학하게 됐어요. 만약 제가 그때 전학을 가지 않고 그 학교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요.
처음 기간제교사로 근무했던 학교도 경제 수준이 낮은 동네였거든요. 국어과목까지는 과외를 하는 애들이 많지 않아서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애들을 잘 가르쳐줘서 입시에 도움이 되게 해 줘야겠다. 이런 마음이 있었고 즐겁게 수업했던 기억이 나요. 반면에 지금 제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 앞으로 복직할 학교는 경제적 수준이 높은 지역이에요. 부진아도 전혀 없고 기초학력자체도 높죠. 사실 여기서는 제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휴직 전 근무하는 동안에는 슬플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뭘 해줘야 하나, 뭘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휴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복직을 한다면 기존에 관심을 갖고 있던 교육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 교육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들을 직접적으로 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해보려고 해요. 기존에 제가 잘해왔던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 말고 토론수업과 같이 답이 정해지지 않은 수업, 제가 진행하기 어려웠던 수업도 다시 도전해보고 싶어요. 기존에 저에게 편안한 방식에서 계속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뭔가 깨부수며 나아가는 기회를 만들어 보려고요.
- 먼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잘 없어 보여요.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해내는 것 같아요.
전혀요. 미래에 대해 엄청 고민해요. 항상 초점이 미래에 있어서 불안했거든요. 그래서 안 그러려고 노력해요. 제가 이 순간에 책임감을 갖고 살려면 오늘을 살아야 되더라고요. 미래의 어떤 이미지를 끌어오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방금 이야기한 일에 대한 교육자로서의 제 모습 또한 미래를 상상하면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앞으로 저의 교사생활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제가 수업하는 그 한 시간을 만들어야 하고 만들 수 있을 뿐이에요.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제가 수업하는 한 시간 동안 즐겁게 잘 지냈다면 저는 그걸로 됐어요. 조금 더 욕심 내자면 어쨌든 국어교사로서 아이들이 중학교 때 책 읽었던 경험이 좋아서 계속해서 다른 책들을 찾아 읽게 됐다든가, 일기를 쓰게 됐다든가, 그때 국어시간에 책 읽고 얘기했던 그 기억이 좋았다고 해준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재미있는 경험을 하는 시간들이 모여야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를 알아가는 사람이 될 테니까요.
위 글에 고스란히 담지는 못했지만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생각보다 자주 등장한 문구가 있었다. ‘~한다면 더 슬퍼질 뿐이다’, ‘~를 제외하고 생각한다면’이었다. 스스로에 대해 지나친 연민을 느끼거나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두고 일상을 살아내는 그녀의 책임감과 성실함이 담긴 표현이었다. 언뜻 보면 무심한 삶처럼 느껴진다. 그녀 역시도 스스로가 다정함이나 따뜻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존의 삶과 정 반대의 모습을 지닌 육아를 지난 몇 년간 해내면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누구보다 다정하고 친절하고자 애써왔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이를 이루기 위해 공부하고 고민했다. 자신이 한계라고 생각한 지점에서는 기준을 낮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어 스스로를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육아에 매몰되지 않고 회색지대에 서있을 수 있었다. 육아의 시간이 나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그저 알아가면서, 내가 느끼는 욕망과 감정들을 성급하게 포장하려 들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얻어낸 결론은 담백하게 받아들이고 그 결론마저도 언젠가 변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 인터뷰를 하게 된 계기나 소감이 있을까요?
육아가 지금은 저에게 가장 큰 부분이지만, 일도 중요한 부분이고 앞으로 복직하게 되면 더 중요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휴직기간 동안 육아와 일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무엇이었는지 인터뷰를 매개로 좀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그래도 ‘내가 무의미하게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니었구나, 지금까지 나는 이런 생각으로 육아와 일을 해왔구나, 앞으로 남은 휴직생활도 이렇게 의미를 찾아가며 해봐야지.’ 생각하게 됐어요. 물론 의미는 바뀔 수도 있겠지만 ‘첫 애가 5살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라고 기록해두고 싶어요.
인터뷰 명을 '호밀'로 명명한 이유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호밀빵이 겉보기에는 퍽퍽하고 맛없어 보이잖아요. 하지만 씹다 보면 고소하고 건강에도 좋죠. 저의 모습과 닮아있기도 하고 알면 알수록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저의 바람이기도 해요."
오늘 인터뷰에 담긴 그녀의 담백한 이야기가 육아회색지대에서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건강한 빵 한 조각을 선물하는 시간이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