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의 함정
간식거리가 드물던 시절, 보릿고개를 지나서야 겨우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생쌀을 한 줌 넣고 조금씩 씹으며, 그 속에서 스며 나오는 고소하고 달착지근한 맛을 음미하곤 했다. 크고 둔탁한 가위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엿 사세요~ 엿!”을 외치며 골목을 누비던 엿장수 아저씨도 기억난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나 낡은 고무신을 내주고 받아온 엿 몇 조각은, 입안 가득 번지는 군침과 함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안겨주었다. 부족함 속에서 누리던 충족의 기쁨이었다.
1970년 새마을운동을 기점으로 농촌의 생활 기반은 빠르게 달라졌고, 70년대 중반에는 TV와 라면, 과자가 가정 안으로 들어왔다. 내 기억 속에도 이 무렵, 처음으로 샴푸로 머리를 감았던 순간이 또렷이 남아 있다. 삶은 조금씩 윤택해졌다. 해외여행은 여전히 먼 이야기였지만, 경제성장의 흐름만큼은 거스를 수 없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 한국은 눈부신 고도성장을 거듭했고, 이제는 세계 주요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며 풍요를 일상처럼 누리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국민의 15~20%가 1년에 한 번 이상 해외여행을 다녀올 만큼 흔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편리함이 곧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연휴마다 공항을 가득 메운 인파 속에는 즐거움보다는 의무에 가까운 열망이 숨어 있다. 남들이 다 하니 나도 해야 한다는 비교의 심리가 작동한다. “처음에는 사랑, 나중에는 계산”이라는 냉소적인 문구처럼, 채움의 욕망은 곧 또 다른 결핍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오늘 우리는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1회용 제품은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영원히 썩지 않는 쓰레기를 산더미처럼 남겼다. 돈만 있으면 어디서든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시대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편리함이 주는 즉각적인 만족은, 깊고 오래가는 충족을 대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생쌀을 씹으며 느꼈던 그 고소하고 달착지근한 충족을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개인의 향수를 넘어 사회의 단면을 비춘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는, 편리함 뒤에 가려진 공허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모든 것이 손쉽게 주어지는 시대에, 우리는 오히려 삶의 의미와 진정한 만족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편리함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쩌면 끝없이 결핍을 겪는 빈곤자로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채울수록 공허해지는 삶이라면, 역으로 비워보는 것은 어떨까.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직접 만들고, 기다리고, 음미하는 시간을 되찾는 것이다. 즉석식품 대신 직접 끓인 국물의 깊은 맛, 배달 대신 걸어서 찾아가는 작은 가게의 온기, SNS 대신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의 따뜻함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
비움에 익숙해질 때, 우리는 작은 것에서 더 큰 감사와 충만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고도성장이 남긴 편리함의 함정에서 한 발 물러나, 느림과 탈성장의 지혜로 삶을 다시 채우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