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만에 밟은 운동장, 그리고 떠내려간 고무신
졸업 후 처음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을 밟았다. 반세기 만이다. 카카오맵의 안내를 따라 학교로 향하는 길, 어릴 적 살던 집은 이미 다른 공간에 편입되어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옛 도로의 파편이 드문드문 남아 있긴 했으나, 하천을 중심으로 우후죽순 들어선 건물들은 유년의 전경을 싹 지워버렸다. 올레길 표식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 하천 위 다리를 건너며, 나는 잠시 길을 잃고 헤맸다.
여름이면 큰비에 하천이 범람해 집안까지 물이 들이치곤 했다. 수라장이 된 집을 정리하느라 어른들은 기진맥진했지만, 콸콸 흐르는 냇가는 우리에겐 최고의 놀이터였다. 어느 날, 산 지 얼마 안 된 고무신을 신고 물장난을 치다 급류에 휘청이는 사이 고무신 한 짝이 순식간에 떠내려갔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서도 눈앞에서 멀어져 가던 그 고무신은 한동안 내 동공 속을 떠돌아다녔다.
지금도 물소리를 들으면 내 안의 잠자던 무언가가 꿈틀거림을 느낀다. 빗소리, 시냇물 소리, 샘물 소리... 흐르는 소리들은 보이지 않는 영혼을 깨우는 노크 소리처럼 다가온다.
나는 산에 오르기보다는 바다에서 게헤엄을 치며 파도타기를 더 좋아했다. 그래서인가 나는 넉넉하고 따듯한 품이 있는 산보다 검푸른 빛에 깃든, 보이지 않는 깊이를 품은 냉철한 바다를 더 닮은 것 같다. 초등친구들에게 좀 더 다정다감한 눈빛을 건네지 못한 미안함을, '본래 생긴 꼴이 바다를 닮아 그러니 이해해달라'는 농담 섞인 고백으로 대신해 본다.
하천가를 거슬러 올라 다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담벼락마다 동화책 같은 총천연색 그림들이 그려진 구불구불한 길. 혹시 내가 어릴 적 다녔던 등굣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동화 속 주인공이 된 착각에 잠시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집으로 갈 때면 그 경사진 길을 폴짝폴짝 뛰면서 다녔던 내 모습이 환영처럼 나타난다.
운동장에는 이제 황혼의 미소를 띤 친구들이 모여 어린 시절을 소환하고 있었다. 내 키만 했던 녹나무들은 어느새 우람한 거목이 되어 운동장을 지키고, 아담한 크기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하늘 아래 그 위엄을 내뿜고 있다. 저 높은 동상을 우러러보던 그 시절의 우리에게 세상은 얼마나 거대하게 보였을까.
친구들이 걸어온 삶의 궤적은 다채로웠다.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놓쳤으나 자수성가한 친구, 기성회비를 못 내 선생님께 들었던 핀잔을 흉터처럼 안고 살다 이제는 지역의 유지가 된 친구,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보통의 행복을 일궈낸 친구들. 우리는 오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데 어우러진 '시간의 우주선'을 함께 타고 유영했다.
굽이굽이 흐르는 하천은 변했어도 그 소리는 여전하듯, 우리네 삶의 흐름 또한 시간의 다리 위에서 다시 하나로 만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