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린 코를 잇던 마법과 절박함으로 차려낸 식탁
얼마 전 건져 올린 물의 선율 속에는 엄마에게 등짝을 얻어맞던 아릿한 기억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내 몸이 기억하는 엄마의 손길이 어디 쓰린 매뿐이었을까. 기억의 뜰을 조금 더 깊이 파헤치자, 이번에는 보드랍고 따스한 빨간 털실 뭉치가 만져졌다.
엄마의 전성시대를 복기해 본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가족의 아침을 준비하시던 뒷모습. 연탄불을 갈고, 아버지 회사의 직원들 식사까지 챙기느라 겨울이면 수백 포기의 김장을 해치우던 그 투박하고 억척스러운 손길을 기억한다.
먹고사는 일이 삶의 전부였던 시절이었지만, 엄마는 그 틈에서도 여유를 빚어내셨다. 아니, 어쩌면 짬이 나는 시간마저 뜨개질 같은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이 엄마만의 고요한 휴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늘 끝에서 피어나던 마법
어린 날의 나는 엄마가 손수 뜬 빨간 스웨터와 바지를 세트로 입고 골목을 누볐다. 하양검정 고무신이 흔하던 시절, 반짝이는 구두까지 신고 나섰으니 나는 엄마가 세상에 내놓은 가장 공들인 작품이었던 셈이다.
한 번은 엄마의 미완성 뜨개질감을 만지다 바늘이 쑥 빠져버린 적이 있었다. 당황해 끼우려 할수록 코는 속절없이 풀려나갔고 나는 울상이 되었다. 그때 나타난 엄마는 풀린 실을 스르륵 잡아당기더니 바늘을 코 사이로 싸악 끼워 넣으셨다. 마법 같던 그 손놀림을 바라보던 나의 작은 눈은 동그랗게 커졌다.
그 기억의 힘이었을까. 훗날 나 역시 첫딸을 얻었을 때 서툰 솜씨로 옷을 떠서 입혔다. 엄마에게 받은 온기를 자식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나 보다. 얼마 전에는 손주의 작고 귀여운 발에 내 딸이 손수 뜬 양말이 신겨져 있는 걸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의 바늘이 시공간을 넘어 손주의 발등 위에까지 머물고 있었다.
생존을 위해 차려낸 풍성한 축제
엄마의 마법은 바늘 끝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요리에도 거침이 없으셨다. 큰며느리 특유의 넉넉한 손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거기엔 아픈 역사가 숨어 있다.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생사를 넘나들던 시절, 무엇이라도 잘 먹여야 살릴 수 있다는 절박함이 엄마를 음식 앞에 아낌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가스레인지 시대가 오자 도넛과 빵까지 구워내며 우리 집 식탁을 풍성한 축제로 만드셨던 건, 어쩌면 살아남은 가족들과 누리는 안도의 잔치였을지도 모른다.
그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았는지, 나도 신혼 초에 겁 없이 손님들을 초대한 적이 있다. 맛있게 요리를 먹는 손님들이 "솜씨가 대단하다"며 부러워할 때, 옆에서 남편이 툭 던진 한마디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사실 저도 이 요리, 오늘 처음 먹어봅니다."
이제는 따스한 보자기로 감싸 안고 싶은 인생
자식들이 둥지를 떠나고 홀로 남은 집에서 엄마는 어떤 시간을 보내셨을까. 아픈 몸을 이끌고 자식들을 위해 상을 차리는 것이 엄마에겐 고독의 치료제였을 텐데,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 정성 어린 상 앞에 자주 앉아드리지 못했다.
지금 엄마는 병실의 하얀 침대 위에서 먼 곳을 바라보고 계신다. 가끔 정신이 명료하지 않은 엄마를 뵐 때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고된 나날이었겠지만, 부디 삶의 끝자락에서는 당신의 여정이 얼마나 아름다운 작품이었는지 자각하며 평온히 머무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위대한 살림꾼이었던 엄마의 속내를 헤아릴 겨를도 없이 나 살기에만 급급했던 날들을 뒤늦은 죄송함으로 고백한다. 엄마의 강인한 생활력과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한다.
삶의 여정에서 쌓였던 모든 원망과 아픔은 이제 내가 따스한 보자기에 감싸 녹여드리고 싶다. 엄마의 마음 안에 환한 미소와 평온의 에너지만 가득하기를. 우리도 엄마가 닦아놓은 그 길을 환히 웃으며 따라가겠노라고 야윈 손을 꼭 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