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에 깨다
빗소리에 깼다.
잔디밭 위에 가로로 누워 있는 내게 수직으로 내려와 안기는 비의 감촉. 그 선율은 마치 다른 차원으로 여행을 떠나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생각도, 감정도 비와 함께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그윽한 평온 속에 파묻혀 사는 신선들의 기분이 이런 걸까. 그 기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비몽사몽 꿈결을 헤매다 눈을 뜨니 아침 9시가 다 되어 있었다. 10시 항공편으로 서울에 가야 할 아들도 여전히 꿈나라였다. 평온은 순식간에 깨졌다. 급히 아들을 깨우고 공항을 향해 과속하며 달렸다. 현실은 늘 이렇게 예고도 없이 성급히 찾아든다. 꿈과 현실 사이를 분주히 넘나든 아침이었다. 여느 때보다 늦게 아침 루틴을 시작하며 물 한 잔을 들이켰다.
나는 어릴 적부터 유독 물을 좋아했다. 한겨울에도 식후에 마시는 냉수 한 잔이 그렇게 달았다. 졸졸거리는 시냇물, 계곡을 삼킬 듯 흐르는 물줄기, 창가에 다양한 연주를 들려주는 빗소리, 처마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낙수, 포효하거나 혹은 자장가처럼 고요한 파도 소리... 물이 빚어내는 소리는 그 어떤 악기보다 내 가슴에 깊은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인체의 대부분이 물로 구성되어 있어서일까. 몸이 물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본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창가에 부딪혀 구슬처럼 맺힌 작은 물방울들이 중력을 따라 흐르다 서로 만나 하나가 된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주르륵 흘러내리는 그 투명한 길 위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아른거리며 따라 내려온다.
모래가 서걱거리며 씹히는 도시락조차 꿀맛 같던 시절. 바다를 좋아했던 내게 해수욕장에서의 시간이 가득한 여름방학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평일의 바다는 내게 쉽게 허락되지 않는 성역이었다. 방과 후 바닷가에서 멱을 감고 보말을 캐던 친구들이 어린 마음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 부러움을 이기지 못한 어느 날, 나는 친구를 따라 바다로 내달렸다. 수평선 끝까지 내 마음은 벌써 달려가고 있었다. 옷을 벗어 돌로 꾹 눌러두고, 팬티 차림으로 바다의 품에 덥석 안겼다.
그날의 바다에서도 오늘 아침 빗소리에서 느꼈던 그 아득한 평온을 느꼈던 것 같다. 정신없이 놀다 석양이 바다를 붉게 물들일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내 팔에 허옇게 배어있던 바닷물의 소금기를 혀끝으로 핥아본 엄마는, 회초리를 잡을 새도 없이 '철썩!' 하고 손바닥으로 내 등을 내리쳤다. 물방울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귓전에는 여전히 바다의 포근한 감촉과 파도 소리가 맴돌았다. 매 맞은 등의 아픔은 파도가 부서지는 하얀 포말 속으로 기분 좋게 사그라들었다.
지금도 창가를 두드리며 이내 녹아내리는 짓눈깨비 소리와 그날의 파도 소리가 내 안에서 화음을 이룬다. 물은 언제나 나를 흔들고, 위로하며, 다시 평온의 자리로 이끌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