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그림자

사라봉에서 아버지를 만나다

by hym

사라봉 산책길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아버지는 새벽 5시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라봉을 오르셨다. 여름방학이면 눈을 비비며 졸음을 안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사라봉 오르는 길가에 사는 풀, 들꽃, 나무 이름들을 하나하나 알고 계셨다. 지금은 식물채집이 생태계 보전 차원에서 금지되었지만 당시는 여름방학 단골과제였다. 벼락치기를 일삼던 내가 식물채집과제만큼은 가장 자신 있게 해 갔다. 든든한 ‘백’을 둔 아버지 덕이다.


호기심 어린 손으로 눈길이 닿는 식물들을 뿌리 채 뽑아 가져간 가방에 고이 넣는다. 집에 온 후, 데리고 온 식물들의 흙을 살살 털어내고 스케치북 사이사이에 조심히 눕힌다. 뿌리 중간부분과 몸통 윗부분을 테이프로 살짝 고정하고 채집날짜와 이름을 적는다. 식물들이 끼어들어 두툼해진 스케치북을 꼭 누른다. 툇마루 구석에 놓인 다듬잇돌을 힘껏 밀어 세워서 스케치북을 놓고는 다시 제자리로 내려놓는다. 육중한 무게에 눌리는 순간 식물의 형태는 고정된다. 방학이 끝날 즈음이면 식물들은 완전히 건조된 채 솜털까지 그대로 멈춰있다.

어릴 적엔 멀고 높게만 느껴졌던 사라봉, 이제는 입구에 생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출발하면 쉼 없이 단숨에 오를 수 있다. 약 8분. 사라봉 팔각정에 서면 남쪽으로 시내가 훤히 보이고 북쪽으로는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진다. 바다와 대지는 이승과 저승처럼 경계가 분명하면서도 늘 함께 어우러진다. 노을이 질 무렵이면 영주십경(瀛州十景)에 속하는 사봉낙조(紗峰落照)를 바라볼 수 있는 축복도 누릴 수 있다. 어둠이 내리면 무수히 반짝이는 어선의 불빛들이 벌이는 은빛축제도 감상할 수 있다.

사라봉 오를 때마다 아버지를 만난다. 그분의 미소, 발소리를 만난다. 그분의 숨결조차 들리는 듯하는 날에는 구석에 박혀있던 그리움이 화들짝 놀라 깨어 내 눈시울을 뜨겁게 달군다. 아버지의 일상은 묵언의 가르침이 되어 스케치북안에 표본으로 남겨진 식물처럼 내 삶에 굵직한 주춧돌로 서있다. 어머니에게 맞았던 그 흔한 사랑의 회초리 한번 맞아본 적 없지만 아버지의 존재 자체는 회초리보다 더 강했다.


그분의 그림자는 지금까지도 나와 함께 숨 쉬며 지혜의 트리거가 되어주신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 나의 아이들에게 난 어떤 존재일까? 아버지처럼 나의 그림자가 그들의 삶에서 좋은 나침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까? 말보다 나의 하루를 잘 사는 것이 그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사라봉을 오른다. 나의 일상이 언젠가는 그들의 삶 안에서 주춧돌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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