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이라는 이름의 면죄부
콰이강의 다리 위 조선인은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조형근의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를 읽으며 깊은 공감과 함께 오래된 질문 하나가 마음속에 일었다. 과거의 전쟁사를 넘어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되풀이되는 이 질문은, 비극의 역사를 멈추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윤리적 과제다.
한때 나는 기관의 부당한 인사와 비리에 맞서며 아슬아슬한 하루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당시 기관장은 조직을 사유화하고 인사를 좌지우지하며, 은밀한 방법으로 부패의 싹을 키워왔다. 오랜 침묵 끝에 협의체가 결성되었고, 기관장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던 시스템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곧이어 저항에 앞장선 이들에 대해 노골적인 탄압이 시작되면서, 상식 밖의 황당한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권력자의 지시에 충성하며 동료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처우에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이들에게는 인센티브가 주어졌다. 굴욕적인 지시조차 훈장인 듯 여기며 심복을 자처하는 이들의 모습은 낯설고 씁쓸했다. 고통받는 동료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들 또한 냉혹한 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 역시 양심과 상식을 모를 리 없었을 터. 동료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압력 앞에서 일말의 갈등을 겪었을 그들을 생각하면 때로는 측은지심이 올라오기도 했다.
방관이나 침묵도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된다. 그러나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 그들의 행위를 전적으로 비난하기도 어렵다. 살기 위해 그랬다는데, 누가 감히 비난의 화살을 겨눌 수 있을까. 각자가 처한 자리에서 내린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권력자의 지시에 따라 동료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한 이들은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이 질문은 책 속의 조선인 포로 감시원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그 역시 생존을 위해 일본군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야 했던 처지였다. 그러나 단순한 복종을 넘어 포로의 고통을 즐겼던 행위까지 이해되고 용서받을 수 있을까? 당시 “포로가 되느니 죽어야 한다”는 일본식 군사문화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전으로 작용했고, 이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즐기기까지 하는 만행으로 변질되었다. 저자는 묻는다. 명령에 따른 행위라 해서 개인의 윤리적 책임까지 면제될 수 있는가?
다행히 모든 감시원이 잔혹했던 것은 아니었다. 폐쇄된 열차 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공포에 떨던 포로들이 제발 "문을 닫지 말아 달라"라고 애원할 때, 그 부탁을 들어준 감시원이 있었다. 그 작은 친절과 동정심은 누군가에게 생명의 동아줄이 되었다. 절박한 어둠 속에서 스며드는 한 줄기 빛, 이것이야말로 인류를 지탱하는 희망의 핵이 아닐까.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일은 많지 않다. 조직의 지시에 순응해 동료를 억압한 이들이나, 콰이강의 다리 위에서 잔인한 감시원 역할을 했던 조선인이나, 그들의 행위는 결국 생존이라는 원초적 본능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이해가 곧 면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인이나 공동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행위, 특히 그것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저버린 경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생존의 경계를 넘어선 행동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단호한 윤리적 심판이자, 다시는 그 어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인간 의지의 증명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