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생각이 많아지면 글을 썼다
이따금 옛날이 생각나면
그때 썼던 글을 찾아본다.
다시 읽어도 내 경험이라 나는 재밌다.
일기를 쓰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글은 즐거울 때보다 힘들 때 더 솔직했다. 글을 쓰며 힘든 순간을 버텼다. 지나면 별 거 아니라 하지만 버티는 시간은 지옥이었다. 힘들었던 때가 있어 현재가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나이가 들면서 감각은 무뎌지고 기억도 흐려지는데, 글을 쓰면 기억은 선명해진다.
어릴 때 쓴 글이 어설프더라도 내 삶을 이끌어준 글이라, 힘들 때 나를 지탱해준 글이라 너무 소중하다.
최근 몇 년은 일기를 쓰지 못했다. 전보다 꾸준히 읽고 썼지만 내 삶은 빠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누군가의 글을 읽지 않고 내 삶을 쓰고 있다. 내 삶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버겁다. 일도 육아도 부부관계도 안정된 것은 없다.
동네언니는 지금 벌려진 일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하나씩 정리하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권유했다. 최근 내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의 눈에도 나라는 사람에게는 정리가 필요해 보였나 싶었다. 나는 정작 그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 삶이 정리된다면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에 내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엄마로, 직장녀로, 주부로 하루를 쪼개서 바쁘게 사는데, 거기에 일기를 쓰는 시간까지 더 쪼겠다. 밀린 일기를 쓰게 된 이유는 지난 5년간 나를 잘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핑곗거리를 찾으며 자신과의 대화를 피하지 않을 것이다.
서른넷의 끝과 서른다섯을 시작하는 그 사이에 새해맞이는 커녕, 적막한 집에서 휴대폰 액정에 내 마음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 공부를 끝내니 일상이 느슨해졌다. 내 삶 어딘가에 혼자 갈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관심사를 따라 책 관련 블로거들의 게시글을 보면서 독립출판을 제작하고 판매하고 워크숍도 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접했다. 여기에 참여하면 공허함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와 가정에서 치이는 워킹맘의 단순하고 고달픈 삶에서 다시 내 이름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설레었다.
오키로북스에서 주관하는 <나를 돌아보는 에세이>를 신청했다. 4주 동안 진행되는데 각주마다 책 한권을 선정하여 그 책을 읽고 나의 이야기를 A4용지 1장에 써보는 워크숍이었다. 회원들은 한주간 같은 책을 끼고 살았으며, 자신만의 에세이를 썼다. 모임날이 되면 각자 돌아가면서 읽고 타인의 글에 의견을 주었다. 남과 같은 시간대에 같은 책을 읽지만 생각하는 바, 자기 삶에 투영시키는 바는 달랐다. 회차가 진행될수록 책을 읽는 것보다 회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미있었다. 같은 시기에 같은 책을 보고 서로 쓴 것을 나눈다는 것이 이런 즐거움일까?
글을 함께 읽다 보니 글에 힘이 붙는 것 같았다. 혼자 쓰고 혼자 보는 것보다 같이 나누니 감동이었다. 내가 쓴 글을 통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었고, 나도 타인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 서로 웃고 웃으며 소통했다. 맛있는 것을 나눠 먹으면 더 맛있듯 감동도 더 오래간다는 것을 느꼈다. 혼자 쓰는 글쓰기는 중도 포기할 확률이 높지만, 일정이 있고 남들과 공유하면서 쓴다면 지속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임에 참여하는 내내 즐거웠다. 처음엔 내 삶을 쓰는 게 재밌었지만 회원들이 자신들을 드러낼수록 그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지난겨울에 썼던 밀린 일기를 지난번에 모임 했던 회원들을 떠올리며 썼다. 대부분 여자들이었고 나와 비슷하던가 어렸다. 사실 어린 친구들이 더 많았다. 워킹맘은 워킹맘의 부분에 공감을 해줬고, 동생들은 내가 예전에 느꼈던 고민들을 공감해줬다. 감정을 나눌 수 있음에 위안을 얻었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지만 적어도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같은 것을 바라본다.
밀린일기를 쓰면서 내 삶은 긍정적으로 변했고 앞으로 힘든 시간이 오면 또 생각날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휴대폰 메모 어플에 쓱쓱 써서 다시는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메모 어플로 글을 안 볼뿐더러 나중에 휴대폰을 바꾸던가 잃어버리게 되면 내 소중한 일기는 사라질 것이다.
나를 돌아보기 위해 쓴 글은
앞으로의 더 많은 날을 살게 될
나를 지탱해줄 것이라는 것을.
고통의 낙서는 책으로 탈바꿈하여,
언제든 손에 닿을 듯 책장에 꽂힌 것임을.
함께 나눔으로써
위로와 응원이 될 수 있기에,
내 삶을 조금은 드러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