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의식, 꿈을 쫓다.

04. 꿈은 자면서 꿀 껄

by 봄에

자면서 꿈이나 꿀 껄

왜 꿈을 이루겠노라 꿈을 내려놓지 못해

즐겨도 되는 시간에 즐기지 못했을까





언젠가부터 아파트분양 광고가 티비에 나왔다. 건축가가 스케치를 하면 그것이 실제로 변하면서 멋진 집에 사는 연예인의 삶이 그려졌다. 광고에서 내가 반한 장면은 건축가가 그린 스케치가 실물로 바뀌는 1~2초였다.

건축가가 된다면 그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중학생 때 건축과를 가고 싶다고 하니까 건축과는 공대에 있기 때문에 이과를 가야 하고 고등학생이 돼서도 공대를 지망하니 선택과목도 물리 2로 지도받았다. 수학과 물리는 기본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과생이 되었다.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 교육효과가 월등히 높았지만 내 삶에서 미술은 너무나 먼 것이었다.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크느라 책보다는 밭에 쌓여 있는 일을 보며 자랐다. 부모님께서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못 가면 대입에 실패한 것이라고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셔서 내 유년기는 세상 태평했다.


입시공부를 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을 때는 공부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참으로 암담했다. 정작 꿈이 생겼을 때 서울에 있는 유명대학에 지원하는 것은 일찍 포기해야 했다. 공부를 시작하기엔 따라잡을 만큼 잘할 확신도 없라서 앞으로 어떻게 살 까란 고민을 더 많이 했다. 어차피 서울은 못 가니까 어느 지방에 가서 살까? 집에서 가까운 대학을 가면 동네에서 보던 사람들을 또 보겠지?


서울에 못 가면 집에서 가까운 학교를 가거나, 지방 거점 국립대를 가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나의 대입 목표는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서울은 못 가고 지역 사람을 만나지 않을 법한 곳에만 원서를 냈다.





건축과에 입학하니 학기마다 설계수업이 배정되었다. 전필 과목으로 한 학기 동안 주제를 정하고 매주마다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학교는 건물을 어떻게 설계하는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역사와 앞으로의 방향만 제시해주었지 표현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개인의 몫이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앞서 왜 이렇게 밖에 하지 못할까라는 자괴감에 자주 빠졌다. 마감의 압박, 창작의 고통과 즐거움에 빠져서 늘 허우적거렸다. 발표는 짜임새 있게 준비했지만 결과물에 시간을 쏟지 않아서 최종 패널은 늘 초라했다. 생각한 것을 보기 좋게 편집하여 포장하는 컴퓨터 활용능력이 매우 낮았다. 급격하게 낮아진 결과물을 본 사람들은 말보다 표정으로 소리 내어 먹먹해진 내 마음에 기름을 부었다. 울고 싶은데 애써 울음을 참았다.


사실 설계를 전공하는 학생의 재능을 판단하는 것은 수상경력과 포트폴리오였다. 부족하더라도 마감을 지키고, 완성된 것들을 추린 다음에 내용을 보면서 순위를 정하는 것이었다. 완성해야 공모전에 입상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완성도 못하면서 실력을 밖으로 자꾸 들춰냈다. 공모전에 응모하지 않으면 내 실력은 드러나지 않는데 꼭 제출해서 나의 수준을 확인했다.


작업에 심취해서 스스로의 방법을 정립하고 싶은 욕구가 간절한데 마지막 학기가 되었다. 내 작품을 더 하고 싶었지만 작업하는 나 조치도 방향을 몰라서 잡고 있는다고 결과물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또 사회경험도 없으면서 그림만 그리는 작업은 종잇장에 불과할 것 같았다. 취업을 해야 하는 목적이 생겼고 나도 취준생이 되었다.





서울에 있는 100명이 넘는 건축설계사무소에 입사했다. 회사는 마감날을 보며 다들 퇴근하고 싶어 하는 공동목표가 있었다. 회사 다니면서 상사들에게 배운 것이 대학에서 고뇌했던 것보다 단순했고 쓸모가 있었다.


사원 생활 2년 후 원하는 것이 있다면 흉내는 낼 수 있었지만 나에겐 아무런 결장권이 없었다. 퇴근도 결정할 수 없었다. 상사가 일을 잘하면 나도 성과가 있어 보였지만 상사를 잘못 판단하면 내가 일한 것은 헛수고가 되었다.


첫 프로젝트는 스물다섯살인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금액을 초월했다. 많은 사람들이 투입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거대한 건설업계의 현실 앞에서 나라는 개인은 초라해졌다. 회사생활은 건축가가 되는 것에 가까워지기보다는 월급쟁이 생활에 적응해야 함에, 건설 경기에 체감해야 함에, 건축은 혼자서 할 수 없음에 포기하고 싶었다. 나는 돈도 백도 없으니 돈 있는 자, 공부 많이 한 자 밑에서 열심히 실무나 하다가 내 인생이 끝날 것 같았다.


꿈을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나 자신은 서울에 강제로 끌려온 징용 인부다. 괜히 도시로 나왔다가 취업열 차를 얼떨결에 타서 지금 이 시간에 야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농사일을 하시던 부모님을 떠올리면 추울 때, 더울 때, 비올 때 일을 피하는데, 도시의 노동자들은 계절을 이기려 한다.

추울 때는 난방을 하고 더울 때는 에어컨을 돌리고 밤이 되면 전등을 켜고 일을 했다. 졸려우면 야식을 먹이고 또 일을 했다. 전구를 발명한, 난방을 발명한, 에어컨을 만든 사람이 미웠다. 그들 때문에 나는 밤에 야근 철야를 하고 있는 것이다.


농경인이 도시인이 되려니 얼토당토 한 생각들이 나의 도시생활을 흔들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추기 위해 잠도 줄이면서 일하는 것도 이해불가인데, 이렇게 반복해서 365일을 보내고 앞으로 쭈욱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시생활에 정을 붙이기 힘들었다.





학생 때는 휴학을, 회사원이 돼서는 퇴사를, 학교는 졸업이 보였지만 직장생활의 끝은 퇴사 같아서 관두겠노라 말했지만, 어느 순간 양치기 퇴사자가 되어 있는 나를 마주한다. 막연히 꿈은 꾸지만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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