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지 마세요
예전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보면 매사가 불만인 아름다운 아내 연정인(임수정 분)과 그녀의 남편 이두현(이선균 분)이 나온다. 그들은 서로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을 하게 되지만 결혼 후 그녀는 독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여자로 변해버렸다. 그런 그녀에게 질려버린 두현은 그녀와 이혼하기 위해 최고의 카사노바 장성기(류승룡 분)를 고용하고, 아내를 꼬셔주길 사주한다. 이런 남편의 의도를 눈치채고 그녀는 마지막 라디오 방송에서 이야기한다. 그녀의 이야기가 나의 가슴에 와 닿았다.
“사람들이 제게 말해요. 말 많다고. 그것도 부정적인 쪽으로만.
네, 맞는 말이에요.
살다 보면 말이 없어져요, 한 사람하고만 오래 되갈수록 더 그렇죠.
서로를 다 안다고 생각하니까 굳이 없어지는 거예요. 근데 거기서부터 오해가 생겨요.
사람 속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말을 시키세요. 말 하기 힘들 때는, 믹서기를 돌리는 거예요.
청소기도 괜찮고 세탁기도 괜찮아요.
그냥 내 주변공간을 침묵이 잡아먹게 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집에선 어떻게든 소리가 나요. 에너지라고들 하죠. 침묵에 길들여지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여러분, 저 이혼합니다. 다시 혼자가 되는 거죠. 하지만 저 계속 말할 거예요.
제 자신이 누군지 잊지 않을 거에요. 저랑 비슷한 분이 계시다면 귀 막고 입 막고 장롱 속에 숨지 마세요.
그냥 계속 떠드세요. 그럼 누군가 꼭 답해줄 거예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 나는 버려졌다는 생각으로 위축되었다.
그리고 자신감과 열정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사실 목표가 사라져버린 듯 했다.
한번도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높은 산 정상을 바라보고 뛰어오다 한 순간 그 산이 없어져버린 듯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갑자기 많아진 시간이 어색했다. 처음 몇 주간은 미뤄둔 일들도 하고, 늦잠도 자고, 책도 보면서 행복한 듯 했다. 그러나 점차 그 시간들에 덩그러니 남겨진 내 모습이 어색했다.
열정과 도전은 목표와 꿈이 있을 때 힘이 발휘된다. 그런데 나에겐 내일의 꿈이 없었다.
심지어 무엇을 꿈꾸어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분명 나의 삶을 살아왔는데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호하기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기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생각하기도, 억지로 힘을 내기도 싫었다.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고 싶었다.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었다.
가족들은 점점 조용해지는 나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들에게조차도 웃어 보일 기력이 없었다.
그때 동네 아줌마들의 톡이 날라왔다. 아파트 단지 내 있던 어린이 집에 아이들을 함께 보내면서 알게 된 사이였다. 4명의 아줌마들은 단체 톡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점심 먹으러 가자고.
꼼짝하기 귀찮은 것이 사실이었으나, 회사를 그만 두기 전부터 인사치레로 ‘밥 한번 먹자’를 연발했었다.
이제 백수가 된 것을 그녀들도 아는데 더이상 미룰 변명거리가 없었다.
회사 다니는 나를 위해 아이들 준비물부터 유치원 행사 일까지 챙겨주던 고마운 아줌마들이기에 이김에 진 빚을 갚자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녀들을 만나자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았는지, 쉴 새 없이 담소가 이어졌다.
아이들 친구얘기, 남편얘기, 얼만 전 본 영화얘기, 서로가 입고 걸친 옷과 액세서리 칭찬까지 3시간이 어찌 흘렀는지도 모르게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유는 알수없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녀들과 나의 미래와 꿈, 그리고 암울했던 과거 얘기는 전혀 나누지 않았는데, 나는 그녀들과의 식사가 끝나자 집안 청소라도 할 의욕이 생겼다.
그냥 이렇게 넋 놓고 앉아만 있으면 안되겠다는 경각심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힘든 일을 겪고,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그 암울한 무게에 짖눌려 힘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성은 우리를 빨리 일어나 걸으라고, 뒤처진 만큼 더 빨리 뛰라고 채찍질한다.
그러나 전혀 힘이 나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축 쳐져 있으면 안된다고 이성이 소리치는데, 힘을 짜낼 의욕도 없는 상태일 때 우린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사실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그 상황이 충분히 힘든데 말이다.
이럴 때 우린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다른 누군가의 긍정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
굳이 나의 고민과 어려움을 꺼내어 말할 필요는 없다. 다만 따뜻한 누군가와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밝은 곳에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를 억누르고 있던 침침하고 암울한 기운은 밝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조금씩 가벼워진다. 무엇보다 내 안의 자생력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단단해진 자생력을 바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오늘은 커튼 걷기, 내일은 창문열기, 모레는 나를 들여다보기. 이렇게 하나씩 점진적으로 말이다.
조용해지는 것은 할말이 없어서 조용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나 자신과 대화를 할 때에도 조용해진다.
하지만 표정과 에너지는 분명 다르다.
지금 현재 그 어떤 의욕도 없다면 굳이 혼자 버등버등 힘을 내려 하지 않길 바란다. 오히려 다른 힘을 빌릴 용기를 가져보길 바란다. 그들과 지금 흩어져버릴 가벼운 농담을 하면서라도 내 주변을 침묵이 잡아먹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그렇게 혼자 설 힘이 조금이라도 생겼다면 그때부터는 나 자신과 대화를 시도해보자.
다만 절대 의미 없는 침묵이 당신을 잡아먹게 놔 두지 말자.
당신을 침묵속에 방치하지 말기를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