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예전이 좋았을까?

by 김혜영

반짝 빛나던 그때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얻은 별명은 ‘압구정 마녀’이다. 직장이 압구정동에 위치해 있었던 까닭에 ‘마녀’전에 압구정이란 지명이 붙었다. 별명만 들어도 느낌이 오겠지만 나는 ‘독하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일에 매달렸다. 간혹 호기를 부리지 말아야 할 것에도 호기를 부렸다. 가령 생수통을 갈아야 할 때 다른 동료와 힘을 합쳐서 함께 들어도 될 것을 ‘여자이기 때문에’ 못한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혼자서 끙끙대고 올리다 허리를 삐끗했다. 벌써 10여년 전 일인데 아직도 나는 무리를 하면 허리가 아파서 한의원을 정기적으로 다니고 있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타 부서와 조율을 해야 할 안건이 있을 때에는 출정하는 장군마냥 ‘꼭 이기고 돌아오리라’ 독기를 품고 미팅에 참석했다. 그리고 행여나 불합리한 것이 보이면 앞뒤 안 가리고 바로잡고자 하였다. ‘우리 팀’을 위한다는 대의를 등에 업고.

가끔 ‘쌈닭’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이는 똑 부러지게 일하는 반증이라고 자위했다. 그렇게 ‘압구정 마녀’는 나에게 훈장과도 같았다. 그 속에서 나의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오는 희열마저 느꼈다. 나는 틀린 말은 하지 않았고, 옳은 일에 있어서는 총대를 매는 용기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모습이 다른 여 사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여겼다. 일하는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카리스마 있다.’ ‘자신감 넘쳐 보인다.’며 듣기 좋은 말을 해 주었다.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내 삶은 순간순간 날 선 감정으로 각성되어 있었다. 나에게 인간적인 호의를 보이는 사람보다는 긴장을 보이는 사람이 더 많았다. 한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강박이 생긴 듯 했다. 그래서 퇴근을 하고 나면 너무 피곤했다. 하지만 그렇게 나의 에너지를 모두 쏟는 것이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굳건히 믿었다.

심리학자들은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상황에 반응한다고 말한다. 무기력한 모습 그리고 지나치게 방어적인 모습.

조직에서 우리는 수많은 도전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그 도전상황은 각자의 업무평가에 반영된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경험치와 전문분야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상황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부족함을 인정하기 보다는 두꺼운 감정가면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면 뒤 부족한 점을 숨기고 자기최면을 건다. ‘나는 무엇이던지 잘 해내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높은 성취 벽에 가로막혀 한숨을 쉬는 대신, 애써 외면하고 마는 것이다.

한의원에 가면 침을 맞기 전 침 맞을 부위에 따뜻하게 찜질을 해준다. 그렇게 근육이 이완되고 나면 침을 놔주는데, 의사선생님께서는 침을 놓기 전 이렇게 말씀 하신다. “힘 빼세요.” 힘이 들어가면 원하는 부위에 침이 들어가질 않는다. 침 맞기 전 힘을 주는 이유는 긴장해서이다. 아플 까봐, 혹은 잘못될 까봐. 이런 우려들이 근육을 긴장하게 만들고 올바른 치유를 방해한다. 반면 필자의 경우 한의원을 자주 다니기 때문에 침을 맞으며 잠을 자기도 한다. 어떤 치료일지 잘 알고 있고,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좋은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긴장한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삶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힘을 빼는 게 우선이다. 무턱대고 긴장하고 두려워하기 보다는 두려운 점은 두렵다는 사실로 받아들이자. 그리고 두려운 점이 무엇인지 바로 바라보고 열등한 나의 자원이 무엇인지를 깨달음으로 두려움을 거둬내 보자. 그리고 열등한 나를 받아들이는 고통이 나의 통증을 완화시켜줄 것을 믿어보자.

우리가 따끔한 침을 맞으면서도 한의원에 찾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도록 내 삶의 ‘침’을 찾는 용기를 내어보자. 결국 근자감은 열등한 나를 방어하는 가면일수도 있다.


예전은 언제나 리즈시절?

얼마 전 20년지기인 고등학교시절 친구를 만났다. 16살에 만났으니 20년도 훌쩍 넘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맛있게 밥을 먹고 우리는 ‘아이들 사교육’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고선 문득 우리도 똑 같은 ‘아줌마 코스’를 밟고 있다는 사실에 멋쩍어졌다.

“어머,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아줌만 가보다. 이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걸 보니~”

“우리 고등학교 뒷산에서 점심 먹고 산책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때가 참 좋았는데, 그렇지?” 하면서 깔깔 웃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교복을 입고 학교 뒷산 벤치에 앉아 사온 과자를 먹으며 무슨 수다를 그렇게 떨었는지 지금 내가 생각해봐도 그 모습이 참 예쁜 것 같다. 그때는 젊음도 젊음이지만, 가능성이 무한했다는 그 시절만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이 시점에서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30대를 넘긴 분들께 이 질문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저 없이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꿈 많고 뭐든 이뤄낼 듯한 자신감으로 충만하고 가장 예뻤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No” 이다. 40대를 살고 있는 지금 과거를 반추하면 ‘그래도 그때가 가장 좋은 때 였구나’ 싶지만 과거의 나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듯 하다. 고등학교 뒷산을 거닐며 친구와 나눈 대화 소재만 봐도 그렇다.

대부분 힘든 학교 생활과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그리고 노력해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결과에 대한 한탄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때보다 더 현명한 판단을 할 것 같지는 않다. 그 당시 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고민했고,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40대의 경험과 생각을 가지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돌아갈 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 만큼 나는 10대, 20대때보다 지금 더 현명해져 있기 때문이다.

예전 일에 몰입했던 20대와 30대를 떠올려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 당시 나는 독하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일에 매달렸고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잘하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나의 일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했다. 그리고 가득 채워야만 했다.

이제 40대가 되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그때 ‘나’만으로 가득 채우기 보단 ‘사람’과 ‘배려’로 좀더 채웠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 또한 그 당시의 나로서는 최선의 결과이다. 그래서 후회는 없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예전 할리우드 여배우인 드류 베리모어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다.

“나는 나이 들어가는 게 좋아요. 그만큼 더 현명해진다고 생각해요. 나는 어제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인터뷰를 보면서 많이 공감을 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과거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고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고통 중 하나로 묘사된다. 그만큼 아프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출산을 할 때에는 다시는 아기를 낳지 않으리라 다짐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첫째 아이를 낳으면서 아기는 두 번 다시 낳지 않으리 다짐을 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아이가 커감에 따라 그 모습이 예쁘고, 혼자는 외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째를 낳아볼까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다시 아이를 낳고자 마음먹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출산의 고통을 점차 잊어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 상당한 고통이 있었음은 기억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고통의 색깔과 크기가 희미해진다. 그래서 “그래, 하룻밤만 참으면 되는데, 한 명 더 낳아볼까?” 싶다.

우리가 과거의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이 희미해지고 좋았던 기억만을 남기게 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그 당시 죽을 것같이 힘들고 고민으로 밤을 새었을지라도, 그 고통 뒤에 찾아온 밝은 결과들이 우리를 과거가 행복했다고 회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젊은 시절 밤새 고민하던 첫사랑도 그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제한된 고민이기에, 그것만으로도 아름답다고 기억창고에 저장된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과의 서투른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으면서도 친구들과 기울이던 한 잔 술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과거는 지난 에피소드이기에 아름답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타입캡슐과도 같다.

그러나 10대때, 그리고 20대때 고민과 상처가 너무 힘들어 지금을 훌쩍 뛰어넘어 흔들리지 않는 30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바라지 않았던가? 살아보지 않았던 시간에 대한 막연한 동경처럼, 과거는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았던 시간이므로 다시 도전하고 싶은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예전 노래가사처럼 그땐 그랬었다. 그것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가늠하지 못한 체 관성처럼 살았을지도 모른다.

찰리 채플린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말이다. 지금이 최악의 비극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10년 뒤 멀리에서 보면 ‘돌아가고 싶은 행복한 과거’일 것이다.

막연한 과거 어느 시점과 비교하여 지금을 열등하다고 여기지 않을 필요가 있다. 과거의 고민과 지독한 몰입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잊지 말자. 그때의 고민보다는 지금 조금 진화된 고민을 하고 있음도 인정하자. 그리고 막연한 미래에는 보다 진화된 내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을 필요가 있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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