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곡 중 이런 노래가 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처음 이 곡을 듣고 조금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나는 사랑받는 사람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 노래 가사처럼 존재만으로 사랑 받고, 또 누군가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이 종교적 가치만을 강조하는 억지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첫째 아기를 낳고 나서 나의 생각은 완벽하게 바뀌었다. 태어나자마자 오물거리던 아이는 엄마 없이는 스스로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는 여린 존재였다. 양육자가 만지고 다듬는 대로 아이는 변해갔다. 그래서 매일 자장가로 이 노래를 불러줬다.
“유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유하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있지요..”라고.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아이는 적어도 그 부모에게는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그래서 그런지 큰 아이는 지금도 “사랑받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자만이 아닌가 걱정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엄마 눈에는 자존감 높은 아이로 비춰진다. 큰아이에게 그 노래를 불러줄 때의 내 마음은 단 하나였다. 아이가 사랑을 많이 받고, 사랑을 많이 느끼고 살아가면 좋겠다는 바램.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둘째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음에도 사랑받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양육자가 이 아이에게 사랑표현을 못해줬기 때문이다. 아이는 사랑받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사랑하는 법도 배울 수 없었다. 함께 어울리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 늦었지만 눈물의 관심과 노력으로 우리 아이는 사랑 받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아이들은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할 수도 없고, 건강한 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성인은 다르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소중한 존재로 여길 수 있다. 우린 이 감정을 “자존감”이라고 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자기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려는 감정. 자기를 높여 잘난 체하는 감정”이다.
2015년 초 우리나라는 “메르스”의 거센 공격을 당했다. 특히 어린아이를 둔 부모들은 신경이 보통 예민해진 것이 아니었다. 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치원 인근의 병원에서 확진자가 속속 나오는 상황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수 천명의 사람들이 격리되었다. 인근의 종합병원은 단 한군데를 제외하고 모두 확진자가 발생했다. 혹시라도 보균자들이 있지는 않을까 놀이터도 마음놓고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무서운 공포 메르스를 예방하는 길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손을 잘 씻고, 비타민과 식사를 잘 챙겨먹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면역력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면역력은 유해한 바이러스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내 안의 자생력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스스로의 몸을 지켜내는 당당한 힘이다.
우리 삶에서 면역력은 신체적인 존립을 가능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서적인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면역력은 바로 자존감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굿윌헌팅 등에서 따뜻한 연기를 펼친 로빈 윌리엄스는 2014년 6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애통하게 한 것은 그가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굿윌헌팅에서 삐뚤어진 천재소년에게 “It’s not your fault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며 용기를 주던 그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던 그였기에 팬들의 충격은 더욱 컸다.
자존감의 상실은 이렇듯 아무것도 아닌 작은 바이스러의 침공에도 그냥 무너져버리는 것과 같다. 아무리 건강하게 보인다해도 보이지 않는 장기에 심각한 상처가 있다면 우리는 견대낼 수 없다. 고통을 참고 견딘다해도 언젠가는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아무리 밝고 씩씩하게 보여도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참고 견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언젠가는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
지금은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당신이 태어났을 때 기뻐했을 부모님의 모습을, 그리고 당신이 아팠을 때 당신보다 더 아파했던 옆의 누군가를.
우리가 기억을 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는 이미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던 존재이다. 아니 지금 이 시간도 사랑을 받고 있다.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이고, 느끼지 못할 뿐이다.
설령 그 누구도 당신을 지금 현재 사랑하지 않고 있다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 누가 대신 살아주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는가? 좋았던 시간도, 힘들었던 시간도 오롯이 혼자 잘 견뎌오지 않았던가?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 명, 당신 자신은 당신을 지극히 사랑한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감정이 바로 그 대답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사랑받아 마땅한 당신 자신을 사랑해보길 바란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