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는 31년(1797~1828)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간 천재 작곡가이다.
그 중 그가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을 당시 작곡한 곡이 바로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Sonata in A minor,D. 821 ‘Arpeggione’-Allegro Moderato) 이다. 이 곡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아르페지오네'라는 첼로와 흡사한 현악기를 위해 작곡된 곡이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도 베토벤, 모짜르트와 함께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 슈베르트.
그러나 그의 일생은 성공과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심지어 그의 위대한 곡은 커피 몇 잔 가격으로 팔리기가 일쑤였으니 그의 고단했던 삶이 짐작이 간다.
그의 수많은 곡 중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그가 젊은 날 방탕한 생활로 얻게 된 매독으로 인한 합병증과 우울증을 극심하게 앓았던 27세에 작곡되었다. 그가 절친한 친구 Leopold Kupelwieser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가 그 당시 얼마나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네.
건강은 회복될 가망이 없고,
점점 더 상황을 나쁘게 만드는 절망적인 상상을 하고,
빛나는 희망은 없고,
아름다움에의 열정은 사라질 듯 위협받으며,
사랑의 행복 그리고 우정은 큰 고통을 줄 뿐.
‘나의 평화는 갔고, 나의 가슴은 무겁다. 나는 두번 다시 그것을 찾지 않으리라 (괴테 인용)’
나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며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네.
매일의 아침은 어제의 슬픔을 새롭게 할 뿐이기 때문에.” - 기타 제작가 이제준의 블로그 발췌
그는 생계를 위한 다른 수단없이 작곡만으로 생활한 유일한 음악가였다고 한다.
궁핍한 경제생활, 고통을 주는 육체, 피폐해져가는 우울한 정신은 그에게 희망과 행복을 앗아가버렸을 듯 하다. 그는 천재적인 음악성을 타고 났지만 외적인 조건은 너무도 볼품없었다.
작은 키에 뚱뚱한 몸매, 지독한 근시에 어눌한 말씨. 모든 조건이 매력적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더욱 외롭게 살아간 듯 하다.
그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창작된 그의 음악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음악적인 행복을 선사한다.
슈베르트처럼 드라마틱하게 극단적인 외로움이 아니어도, 우리는 언제나 외롭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도 외롭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외롭다.
돌봐야할 존재가 없어도 외롭고, 돌봐야할 존재가 있어도 고단한 외로움이 있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도 외롭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나의 외로움이 도드라져 더욱 외롭다.
생각해보라. 지금까지 살면서 당신이 외롭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는지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받을 때도 온전히 충만한 감정이었는가? 아니면 언제 변할지 모를 사랑앞에 두렵고, 그 사랑을 내것이라 여기지 못해 외로웠는가?
결혼을 하고 부양할 가족이 생기면서 그들로부터 가득 채워지는 감정으로 행복한 적이 더 많았는가? 아니면 고단한 일상에 숨이 막혀 외로움을 망각하고 산적이 더 많았는가?
우리 몸의 수많은 기관과 장기 중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은 없다.
눈이 마음에 들지않아 거울을 볼 때마다 우울해진다 하더라도, 눈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기관이다.
나는 외로움도 우리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반드시 붙어있는 기관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외로움은 누군가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무슨 사건에 의해서 생기는 감정 또한 아니다.
그냥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감정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자들은 우리 내부의 수많은 감정 중 긍정적인 감정만큼 중요한 것이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말한다.
불안, 두려움, 우울, 억울함, 분노, 답답함, 수치..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차분하게 집중하게 만들며, 분석하고 조율하게 만들어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돕는다. 그래서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를 조금 불편하게 만든다고 회피하거나 ‘나쁘다’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필요한 때’에 잘 꺼내어 쓰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충고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바쁨과 논리의 환경에서 벋어나게 되니, 나는 무기력함과 잉여가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선명히 ‘외로웠다.’
그러나 바쁠 때에도 나는 여전히 외로웠다. 인정받지 못해 외로웠고, 오해 받아 외로웠으며, 외롭다고 표현하지 못해 사무치게 외로웠다. 다만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외롭지 않은 적이 없었던 우리에게
‘외로움’은 친해지기 어려운 쌍둥이일지 모른다.
항상 내 주위를 맴돌던 어색한 쌍둥이 형제. 그러나 누가봐도 같은 모양새의 존재.
부정적인 감정이 더 이상 나쁜 존재가 아님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외로움 또한 부정한다고 우리 곁을 떠나는 존재가 아님을 안다.
그러니 이제는 ‘외로움’과 같이 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군대에 이런 문구가 있지 않은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안타깝게도 외로움은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진화를 거듭하며 우리 곁에 끊임없이 머무는 존재이다.
그러니 ‘외로움’과 함께 사는 방법. 기왕이면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외로움’을 우리 몸의 일부로 당연히 받아 들이는 것은 어떨까?
슈베르트처럼 위대한 무언가로 승화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뭐, 무언가로 승화되지 못하더라도 단지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히 더 불행을 느끼지는 않아도 되기 때문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