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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영 Aug 02. 2020

[윤리에세이] 부끄러워할 용기 1

부끄러움을 잊은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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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의 부끄러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윤동주(1917~1945) 시인이 1941년에 쓴 <서시>의 전문입니다. 


출처 :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

                                            


다른 시 하나도 함께 볼까요?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중략)/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하략)” 


이 시 역시 윤동주 시인이 1942년 일본 유학시절 쓴 <쉽게 쓰여진 시>의 일 부분이예요. 유독 부끄러움에 대해 많이 언급한 까닭에 부끄러움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윤동주 시인. 왜 그는 짧은 생 동안 부끄러움에 대해 그렇게도 많이 이야기했을까요? 그의 삶을 다룬 영화 <동주>에서 그의 부끄러움에 대한 생각이 정지용 시인과의 대화에서 잘 드러납니다.

평소 존경하던 정지용 시인을 만나게 된 윤동주 시인에게 정지용 시인은 임시정부로 가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일본유학을 가라고 권하죠. 그런데 그 당시 일본유학을 위해선 반드시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면서 그들의 대화를 들어볼께요.


동주 “그런데 창씨개명을 하면서까지 유학을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유학을 간다는 게,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요…”

정지용 시인 “부끄럽지, 부끄럽고 말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고, 여기 늘 술만 마시고 있는 내가 부끄럽네. 자네한테 일본에 유학 가라고 하는 나도 부끄럽고. 그렇지만 부끄럽지 않게 사는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나? 윤 시인,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거지.”

이 대화에서 보듯 윤동주에게 “부끄러움”은 적어도 시인으로서의 일생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감정이었던 듯합니다.



부끄러움 난독증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우리 안의 수많은 감정 중 하나예요. 매우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거죠. 

그런데 부끄러움을 느끼는 우리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아요. 빨개진 얼굴을 가리고 싶어하고, 당황한 손을 숨기기 급급하죠.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에 빨개지는 얼굴이나,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 원인 때문이예요.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원인을 깨달은 까닭이죠.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누구는 부끄러워하는데 누구는 전혀 개의치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살 어린아이는 늘 기저귀에 오줌을 쌉니다. 그렇지만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죠. 반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긴장한 나머지 수업시간에 바지에 오줌을 싸면 상황은 달라져요. 그 아이는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심을 느끼며, 과잉된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상황은 똑같은데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갈리게 되요.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화장실이 아닌 친구들이 많은 교실에서 오줌을 싸는 것은 사회통념적으로 옳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참 의미 있습니다. 슬픔, 기쁨, 분노 등의 다른 감정과 비교해보면 어떤 현상을 통해 직관적으로 느낀 다기 보다는, 어떠한 기준에 의해 느껴지는 보다 사회화된 감정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같은 상황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느끼지 않기도 해요. 물론 부끄러움과 수치의 감정은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긴 합니다.

예컨데 부끄러움은 남몰래 코를 후비다가,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쳤을 때 느껴지는 보다 직관적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훨씬 사회화된 감정이예요. 가령 상사의 뒷담화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바로 뒤에서 상사가 듣고 있었다든가, 무단횡단을 하는데 옆에 있던 아이가 “왜, 횡단보도로 건너지 않아요?”라고 물어볼 때 느끼는 감정이죠. 왜 다르게 느끼는 걸까요? 맞아요. 후자의 예시들은 사회적 약속인 규범이나, 법규 혹은 도덕적 원칙을 어겼을 때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 옳지 못한 일을 했다는 것을 자각할 때, 그것도 타인에 의해 자각할 때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는 사회화된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감정은 때론 누군가의 지적에 의해 유발되기도 합니다. 가령 “왜, 그런 일을 했어? 내가 다 확인해봤어”, “너 그거 거짓말이라고 OO이 얘기해줬어”, “이봐요! 여기서 이러면 안되요!” 등 누군가의 확인과 통제를 통해 느껴집니다. 그런데 생각해봐요. 꼭 누군가가 얘기를 해줘야만 지금 하는 행위가 옳은 지, 그른 지 알수 있나요? 


출처 : 크라우드 픽


자, 당신은 지금 오랜만에 한적한 고속도로를 기분 좋게 달리고 있어요. 그런데 방금 먹고 난 커피컵을 버리고 싶어요. 조금만 더 가면 휴게소가 나오기는 하지만 휴게소에 진입해서 주차하는 일련의 과정이 귀찮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결단(선택)하죠. 차창밖으로 커피컵을 휙 던져 버리기로. 이때 지나가는 차량이 창문을 내리고 당신에게 손가락질을 합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 


혹시 분노를 느끼나요? ‘아니 그깟 커피 컵 하나 버렸다고 나에게 손가락질을 해? 그리고 자기가 나를 언제 봤다고 감히 손가락질이야?’ 

아니면 수치심을 느끼나요? ‘아,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구나. 내 생각이 짧았었네. 이젠 이렇게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지 말아야겠다.’ 

전자와 같이 .분노의 감정이 유발되는 것을 저는 <부끄러움 난독증>이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행동은 감정을 유발하구요, 모든 감정은 후속행동을 유발합니다. 만약 전자와 같이 느꼈다면 아마도 분노를 표출하려는 후속행동으로 이어질 겁니다. 모든 감정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어떻게 든 표출되죠. 특히 분노라는 감정은 강렬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밖으로 발산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난 사람은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등의 과격한 행동으로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무단투기라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자신에게 삿대질한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고,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감정을 투사시켜요. 그 과정에서 물론 관계에 장애가 발생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궁금하지 않나요? 


이런 사람들은 왜 부끄러워하지 않는 걸까요? 그 이유는 부끄러움과 양심의 관계에서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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