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따 당해봤나요?
어릴 적 우리 집은 부유하지는 못했다. 부모님께서는 별반 가진 것 없이 경북 안동에서 올라와 서울에 자리를 잡으셨다. 시골에서 살아온 소박한 분들이 대부분 그러시겠지만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초등학교 6년동안 전학을 4번이나 다녔던 나의 전력이 고된 삶을 증명해주는 듯 하다. 그래도 나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친구들을 잘 사귀었다. 엄마 말씀으로는 이삿짐을 내리고 있으면 나는 이미 친구를 만들어서 옆에서 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6년을 다니면서 비록 잘 살지는 못했지만 친구들이 많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 서울에서 자리를 잡으신 일터는 ‘세탁소’였다. 가게는 평수가 작아서 방을 따로 구비할 장소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 4식구가 살아야 했기에 가게 한쪽 바닥에 장판을 깔고 밤에만 잘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낮에는 가게의 연장공간이지만 그 곳에서 우리 네 식구는 밥도 먹고 나와 동생은 숙제도 했다. 손님들의 옷으로 빼곡한 그 공간도 나는 그저 삶의 일부분인듯 당연하게 여겼다.
유난히 친구가 많은 나는 아침 등굣길을 혼자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약 10명정도 되는 친구들이 우리 집 앞에서 모여 같이 등교했다. 하지만 집이 좁은 이유로 빨리 온 운 좋은(?) 몇몇 친구들만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나머지 친구들은 가게 밖에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그 일상이 당연했고 즐거웠다.
그런데 그날 저녁 아빠께서 “혜영아, 너는 집이 창피하지도 않니? 왜 매일 아침 친구들을 데리고 오니?” 라고 말씀하시는 거다.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내 처지가 창피한 처지라는 것을.
그런데 그 당시 나는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철이 늦게 든 게 정말 다행이다 싶다. 사실 초등학교 5~6학년쯤 되면 감수성이 예민해진다. 그런데 내가 그런 상황을 아무 문제없이 넘긴 것은 그때 철이 안 들어서 창피한 것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 하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철이 없었기에 자신감 있고 밝았던 내 모습이 다른 친구들에게는 긍정적으로 비춰진 듯 했다. 그런 환경에서 나는 친구들이 다 나를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고 몇 년 뒤 나는 ‘왕 따’라는 것을 난생처음 당해봤다.
회사를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남편을 만나 바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임신을 했다. 하지만 옮긴 회사에서는 여간 황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분명 입사 면접 시 결혼계획이 없었는데 입사직후 결혼과 임신이 이어졌으니.
그러나 가장 큰 ‘왕 따’의 이유는 동료들과의 소통에 있었다. 회사 특성상 남자동료들밖에 없었고, 여자 직원은 나 하나였다. 그 문화 속에서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고 소극적이 되어갔다. 그 전까지 당당한 마녀의 포스를 풍겼는데, 그런 당당함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이런 내가 답답했지만 곧 이어진 임신과 출산은 나를 더욱 죄인처럼 작아지게 만들었다. 결국 출산휴가를 사용하고 45일을 넘기자마자 나는 회사로 복귀했고 더 이상 ‘민폐’ 캐릭터로 살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엄마에게 맡겨두고 야근과 갖은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나의 존재감을 나타내려 무던 노력을 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돌린 등을 돌려주지 않던 한 동료가 있었다. 그 회사를 그만두는 마지막까지 그 동료가 나를 인정해주길 바랬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나에게서 더욱 더 멀어졌다. 내 자리에서 대각선에 위치한 그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가장 속상한 때는 식사시간이었다. 12시가 되면 다들 자연스럽게 밥을 먹자고 일어서거나 “식사하러 가실까요?”라고 말을 건다. 그러나 그는 내 앞, 내 옆의 동료에게는 식사하러 가자고 손을 잡아 끌면서도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먹는 걸로 맘 상하는 것이 제일 서럽다고 했었나?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죄인마냥 고개를 숙이기 일쑤였다.
결국 나는 자괴감만 커질 대로 커져버렸다. 그래서 하루빨리 그 곳을 벋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만두기로 결심한 어느 날 나에게 처음부터 선의를 보여주었던 동료 한 분이 밥을 같이 먹자고 했다.
그 분은 매일 점심시간마다 나에게 웃으며 식사하러 가자며 얘기해 주시던 분이다. 그분은 조용한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나에게 더 좋은 미래를 축복해주셨다. 대화를 하면서 그 따뜻한 마음이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던지.
그런데 왜 나는 2년정도 같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감사함을 깊게 느끼지 못했을까?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깨달았다.
나는 나를 싫어하는 한 분 때문에 나에게 호의를 갖고 계신 나머지 모든 분들에게 소홀했음을 말이다. 어쩌면 나는 그 회사를 그만 두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아니 좋아할 필요도 없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면 우린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는 그 사실에 우리는 상처받고 흔들리는 것일까? 나를 축복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충분히 위로 받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사회성은 모든 사람과 둥글둥글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사회성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지속하고 돈독하게 만들어가며, 반면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의 방향성을 잃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소홀해지지 않고, 제2의 상처를 주지 않는 주체성이 진정한 사회성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좋아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 틈에 살아갈 확률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을 미워하기 이전에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홀해지지 않도록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갈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유년시절 철이 안 들어서 나는 행복했다.
만약 철이 일찍 들어서 나의 상황이 창피하다고 생각했다면 나는 친구들을 우리 집에 부르지도 않았을 테고, 내가 가진 열등함에 압사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의 친구들은 나의 열등한 요소보다는 밝고 긍정적인 나의 강점에 더 집중했다.
철이 안 들었다는 것은 내 안에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는 나의 시선이 가장 중요하게 자리잡은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시선들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사실 그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우리는 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열등한 점과 우월한 점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그러니 조금은 철이 안든 채로 삶을 살아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