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영 Aug 02. 2020

[윤리에세이] 슈톨퍼슈타인이 우리에게 하는 말

부끄러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Copyright (c) ullimcompany, all rights reserved


부끄러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독일의 거리를 걷다 보면 걸음을 방해하듯 툭 튀어나온 동판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자칫 걸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당연스레 불편함을 주는 그것이 무엇인가 허리를 숙여 살펴보게 되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툭 튀어나온 동판에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글자와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이제는 짐작하게 되죠. 우연히 튀어나온 위험한 돌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그곳에 걸리게끔 위치해 두었다는 것 을요. 그 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이름과 출생년도, 추방 년도, 수용소 이름 그리고 사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동판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시나요?

맞습니다. 2차세계대전의 전범인 독일에서 강제로 수용소로 추방되어 죽음을 맞은 피해자들의 이름과 그들을 의미하는 숫자들입니다. 그런데 동판들 속의 이름이 생소합니다. 그리고 이 동판들이 어떠한 규칙을 갖고 일정하게 위치해 있지 않아요. 어느 지역에서는 한두개만, 또 어느 지역에서는 무더기로 존재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지역에 살던 이름모를 평범한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평범한 이웃이자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사람들의 희생을 그들이 살았던 동네에 동판으로 새겨 넣은 독일인들. 그리고 쉽게 잊지말자며 걸어 다닐 때마다 보행을 방해하는 동판들을 한번씩 더 쳐다보고 추모하자는 그들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출처 : https://www.huffingtonpost.kr/nury-kim/story_b_17748484.html


이 동판을 슈톨퍼슈타인(Sutolperstein)이라고 부릅니다. 

걸려서 비틀거리다의 Stolpern과 돌의 stein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로 말 그대로 걸려서 넘어지게 하는 돌, 걸림돌을 의미하죠. 독일인의 입장에서 이 슈톨퍼슈타인을 생각해보면, 숨기고 싶은 과거임에 틀림없습니다. 본인들의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만행을 하루라도 빨리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을꺼예요. 그런데 구지 이런 동판을 만들고, 희생자들이 살았던 동네를 찾아 도로위에 넣어두는 번거로움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그 이유가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하는 독일인들의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은 역사를 기억하는 장소입니다. 영화로운 순간이었든,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든 그 과거는 팩트이고 그 과거로 인해 지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들 하죠. 그래서 역사를 마주하면 현재를 조명할 수 있고, 조심스레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독일인들에게 슈톨퍼슈타인은 일종의 박물관이고, 반복하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과거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희생당한 그들을 향한 사죄의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다리가 참 못 생겼습니다. 

학창시절 별명이 ‘곰발’이었을 정도로 늘 퉁퉁하게 부어 있는 발과 넓을 발볼 그리고 두꺼운 발목은 절대 반바지를 입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였어요. 하지만 교복치마를 입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못 생긴 다리를 보여야 했지만, 사진을 찍을 때엔 반드시 상반신만 찍었습니다. 전신 샷은 최대한 찍지 않으려 노력했죠. 그렇지만 학창시절 저의 다리가 못 생겼음은 엄연한 사실이고, 지금까지도 고등학교 시절 저의 친구들은 저를 ‘곰발’로 기억합니다. 대학생이 되고 제가 어떻게 했을 지 짐작이 가시나요? 다이어트 보조제를 사용하면서 열심히 다리살을 빼려고 노력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했음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운동이 잘 되지 않을 때 동기부여를 위해 활용한 것은 바로 몇 장 남지 않은 곰발시절의 저의 다리 사진이었어요. 물론 지금 저의 다리가 예쁘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그 시절의 다리보다는 확실히 개선된 모습을 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 시절 저의 다리사진이 저에게 일종의 슈톨퍼슈타인 역할을 한 것이죠.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과거 부끄러움을 유발한 사건이나 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부끄러움을 멀리하고 싶어하죠. 그리고 부끄러움을 멀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부끄러운 과거를 매듭짓는 일입니다. 이때 기억할 것은 외면하는 것이 매듭짓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예요. 이는 마치 타조가 사냥꾼을 만났을 때 그 큰 몸은 그대로 두고 머리만 수풀속에 처박아 두는 모양새와 같기 때문입니다. 외면한다고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재의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지만 뇌리에서 없어지게 만드는 방법은 있습니다. 바로 부끄러웠던 사건 혹은 현상을 직면(수용)하고, 합당한 조치를 취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뇌리에서 사라져갑니다. 비로소 매듭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다리가 못 생겼다고 감추기만 한다면 영원히 시원한 반바지는 입지 못할테죠. 숨기고 싶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나 그때의 내 다리를 직면(수용)하고, 운동과 다이어트 등의 합당한 조치를 취하고 나면, 상황이 개선되면서 서서히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비로소 못생긴 다리에 집중되었던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과거 부끄러웠던 행동과 현상을 마주하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입니다. 독일인들은 구지 동판에 희생자의 이름과 관련 숫자들을 적어서, 그들이 살던 동네 인도에 박아 두는 번거로움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없이 희생된 평범했던 그들을, 지금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가 기억해 주길 바라고 있어요. 그게 바로 그들이 부끄러움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부끄러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부끄러움을 마주하는 그들의 행동은 참으로 용감합니다. 부끄러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일상속에서 기억하려는 그들의 행동은 참으로 용감합니다.



부끄러움의 출발은 양심에서

저는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어요. 

출처 : http://www.hani.co.kr/arti/PRINT/767066.html


요즘 아파트처럼 넓은 지하주차장 대신 좁은 지상주차장에 주차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중주차까지 하는 상황이예요. 그러나 그 속에도 규칙은 있어요. 정주차 구역과 이중주차 선이 있는 곳에만 주차를 합니다. 이중주차선 옆에까지 주차를 하게 되면 옆에 정주차해둔 차가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예요. 

며칠전에는 출차를 하려고 봤더니 이중주차 선이 아닌 그 옆에 차가 주차되어 있는 거예요. 중립기어를 해두지도 않아서 밀수도 없는 차를 보니 화가 나더라구요. 전화를 해서 차주분께 차를 빼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이른 아침에 전화를 받아서인지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고 나오셨는데, 제가 얘기했어요. 이중주차 선이 아닌 곳에 주차를 하시면 다른 차가 나갈 수가 없으니, 주의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차주분께서 “남들도 다 이렇게 주차하는데 뭐가 문제예요?” 라고 답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에 주차하는 것은 잘못된 거 잖아요. 이러면 다른 차에게 불편을 줍니다.” 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분께서는 “별 같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네. 차 안 뺄 테니까 알아서 나가!”라고 하시면서 차를 빼지 않으시고 들어가 버리셨어요. 저는 물론이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 계시던 경비원께서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정말 궁금했습니다. 

분명 규칙을 지키지 않았고, 그 부분에 대한 불편함을 표현하자 사과는커녕 되려 화를 내는 그분의 생각의 흐름이 궁금했습니다. 그는 왜 그랬을까요?

같은 상황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지점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 이유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자 키 163cm는 큰 키일까요, 작은 키일까요? 저는 큰 키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63cm보다 작은 키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여성들을 보면 키가 커서 좋겠다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막상 163cm의 키를 가진 분들은 스스로 작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동일한 현상에 대해 다르게 느끼는 이유는 크고 작음의 기준이 상이하기 때문이죠.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 기준도 이와 유사합니다. ‘벌금형 이상의 처벌을 받아야만 부끄러운 행위야’라고 생각한다면 위법만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라 할지라도 잘못한 행동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행동도 아니라고 인식합니다. 오히려 잠재적 불편함을 말하는 상대가 과민한 사람일 뿐이죠. 그러니 별것도 아닌 일에 왜 가타부타 말하냐며 화를 내는 건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일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합리적인 의구심이 듭니다.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07090600035



‘과연 법만으로 충분할까요?’

법은 지켰지만, 그래서 모두가 공정하고 행복한가요? 

앞서의 이웃분은 위법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공정한 대우를 받은 걸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법 만으로 우리 사회의 건전성과 형평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법은 최소한의 윤리이기 때문입니다. 법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기에, 생각보다 상당히 보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경우의 수만큼 법을 만들기에도 무리가 있죠. 그래서 법을 보완하는 다양한 개념들이 존재하는데요, 도덕과 규칙, 윤리와 매너 등이 이에 속합니다. 위법하여 처벌받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비난 받을 수 있는 이유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행위의 의사결정이 법적 처벌을 받거나 비난을 받는 것에 기준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보다 자발적인 내적 기준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기준을 가지고 있죠. 앞서 언급한 양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양심은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자기검열의 도구이기도 하죠. 양심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아서도 안되겠지만, 터무니없이 낮은 것은 절대 경계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양심의 기준선이 정확한지, 오염되지는 않았는지 수시로 조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조율은 성찰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성찰은 기본적으로 나를 다시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했던 행동과 말,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고의 흐름을 다시 되돌아 보아야합니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어요. 그냥 다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나를 보다 객관적으로 돌아보려고 노력한다는 겁니다. “왜?”라고 그때의 나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야 어제보다 우리는 보다 성숙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작년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충분히 배우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 알랭 드 보통


우리는 모두 어른이 처음입니다. 어느 프로의 제목처럼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좋은 어른이 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배워본 적도 없습니다. 추상적인 도덕과 윤리로 상식적인 학문만을 배웠을 뿐이죠. 그러나 ‘이건 아닌 거 같아’라고 양심이 말을 걸어온다면, 그때가 바로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배워야할 때입니다. 추상적인 좋은 말 대잔치가 아닌, 매우 구체적이고 생활밀착형 방법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그게 우리 아이들에 대한 의무이자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골룸이 되지 않기 위하여

 악의 평범성은 악인이 멀리 있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누구나 조건이 갖추어 지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스스로 수용한다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는 위험을 밝히고 있습니다. 

2018년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S의원은 예산회계시스템에서 국회의원 권한으로는 볼수 없는 자료를 얻게 된 배경을 동영상을 통해 시연하였습니다. 요는 시스템 검색창에 백스페이스를 2번 누르니 권한 외 자료에 접근되었다는 겁니다. 전혀 의도를 가지지 않았고, 우연한 기회에 정보를 얻게 되어 사용하였을 뿐, 전혀 불법이 아니라는 주장이었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4/15/2015041502623.html


자, 이렇게 한번 생각해봐요. 

지금 길을 걷고 있는데 대문이 열려있는 집을 우연히 발견했어요. 호기심에 대문을 열어보니 방문도 잠겨 있지 않아요. 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었더니 금고가 열려 있는 겁니다. 금고안에는 골드바가 하나 있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그 금고안의 골드바를 가지고 나와도 될까요? 우연히 열려있는 집 문을 열고 들어가 금고안의 물건을 집어 나왔을 뿐, 애초에 훔칠 의도는 없었으니 이는 불법이 아닌 걸까요? 

전문가들은 S의원이 고의성과 해킹 툴의 사용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허용된 권한을 넘은 것 자체가 불법이라고 지적합니다.


출처 : 예스24


이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댄 애리얼리 교수는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에서 열쇠장이의 사례를 들어 얘기합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집안에 열쇠를 둔 채 집 문이 잠겨버려, 인증 받은 열쇠장이에게 문을 열어줄 것을 부탁합니다. 불과 몇 분만에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놀라죠. 그때 그 열쇠장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 중 1퍼센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지요.
또 1퍼센트는 어떻게든 자물쇠를 열어 남의 것을 훔치려 합니다.
나머지 98퍼센트는 조건이 제대로 갖춰져 있는 동안에만 정직한 사람으로 남습니다. 이 사람들이 강한 유혹을 느끼면 얼마든지 정직하지 않은 사람 쪽으로 옮겨갑니다. 자물쇠는 문이 잠겨 있지 않았을 때 유혹을 느낄 수 있는,
대체로 정직한 사람들의 침입을 막아줄 뿐이지요.


우리는 누구나 골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누구나 골룸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영화 <신과 함께2-인과 연>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대사가 나오죠. 

“나쁜 사람은 없다. 나쁜 상황만 있을 뿐” 이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의지만으로 비윤리적인 행동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다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윤리성을 높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은 모두가 동의할 거예요. 그럼 이제부터 윤리성을 높이는 방법에 대하여 알아볼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윤리에세이] 나의 불행과 타인의 불행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