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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영 Sep 16. 2020

[윤리에세이] 나만 아니면 돼?!

제노비스 신드롬이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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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https://m.blog.naver.com/chance_pol/221876901334



나만 아니면 돼!


예전 모 예능프로의 유행어였어요. 

복불복 게임으로 식사나 잠자리 등을 결정하던 프로였는데요, 내가 안락하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는 불편해야 하는 상황이 조성되었죠. 그래서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을 의미하였던 프로그램으로 기억해요. 그래서 남의 불행에 기뻐했죠. “나만 아니면 돼!”라고 외치면서 말이예요. 그 모습을 보는 시청자는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우리 현실에도 반영이 된다면 어떨까요? 누군가의 불행을 기뻐하지는 않더라도 피해자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안도감만을 갖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정말 안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퇴근길에 저 앞에서 낯선 사람이 달려옵니다. 그리고 당신 옆의 누군가에게 칼을 휘두릅니다.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피해자가 당신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감이 듭니다. 그리곤 섣부르게 개입해서는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조금의 불편한 마음을 갖고 가던 길을 다시 이어갑니다. 피해자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안일함이 비겁함을 이내 이겨내죠. 그리고 분명 다른 누군가가 신고를 하거나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8/08/543396/


이런 현상을 ‘방관자효과’ 혹은 ‘제노비스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1964년 캐서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오전 3시쯤 귀가하던 길에 자신의 집 근처인 뉴욕 퀸스지역에서 괴한에게 끔찍한 살해를 당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비명소리에 38명의 이웃은 불을 켜고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내려오거나 신고를 하지 않아요. 결국 괴한은 제노비스를 처참히 살해하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방관자효과가 대두되게 되었는데요,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38명이 아니라 6명이 목격하게 되고 그중 2명은 신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4명은 방관자였음에는 변함이 없었어요. 이런 방관자효과는 ‘나 아니어도 누군가는 하겠지’ 혹은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잘 모르니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라는 자기합리화의 방어기재가 가동하여 나타나는 효과입니다. 


그러나 나만 아니면 된다는 소극적인 생각은 사회의 안전과 건전성을 심하게 훼손합니다. 결국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은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사회구조를 창조하게 되거든요. 그 누구도 타인의 불합리한 일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온갖 무장을 해야 할지 모를 사회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나약한 ‘내’가 또 다른 나약한 ‘당신’과 연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약한, 상대적인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그러나 다행이 혼자서는 지켜낼 수 없지만 함께 라면 서로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마치 산기슭의 나무들이 홍수와 산사태를 견뎌 내기위해 뿌리와 뿌리가 얽혀 서로에게 기대고 지지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방관자가 아니라 파수꾼의 시선입니다. 그런데 파수꾼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현상들이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사고의 전환이 그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05/2018020502952.html


전세계에서 일어난 미투(Me too) 운동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각계 각층의 피해자들이 과거 자신이 겪은 성적 폭력을 소리 내어 말하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이 용기 있는 미투는 가해자를 처벌하기도 했고, 처벌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피해자들은 처벌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피해를 당한 게 자랑도 아닌데, 왜 구지 밝히는 거지? 부끄럽지도 않나?” 


라는 주변의 만류가 있었을 지 모릅니다. 

다양한 사회적 사건들 중에서도 성폭력사건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요, 바로 그 사건이 발생한 데에 피해자의 잘못이 있다고 인식하는 사회적 양상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돌아다니니까, 그런 옷을 입고 다니니까,
평소에 행실이 안 좋았으니까
성폭력을 당한 것에는 피해자의 잘못도 있는 거야.” 


라고 쉽게 결론지어 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의 흐름에는 특정한 나쁜 가해자와 평소 문제가 많은 특정한 피해자 사이에서 일어난 그들만의 문제라는 “특정함”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에 나 자신은 배제되어 있죠. 이 메커니즘이 우리를 방관자로 몰고가는 주된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고를 전환해야 합니다. 이런 사건과 현상은 특정한 가해자와 특정한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동체속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사회시스템이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우리가 파수꾼이 아닌 방관자가 되었기 때문이며,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의 부재 때문이라는 것을 함께 공유해야 합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은 정말 무서운 발상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다름아닌 우리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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