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코그 RASKOG 카트
1.
내가 물건을 정리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충' 또는 ‘대강’이라는 부사가 필요하다.
이부자리 정리처럼 크게 눈에 띄는 것들이 아니고서야 문을 닫을 수 있는 곳에 아무렇게나 넣어둔다.
일종의 '숨기기' 기능을 사용하는 것인데, '침실의 문을 닫을 수 없어 이부자리 정리를 열심히 하게 되었다 ‘는 것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나의 집 현관문 근처 수납장에는 청소기, 각종 쇼핑백, 여분의 두루마리 휴지와 세제 같은 것들이 두서없이 쌓여있고 창고를 겸해서 쓰고 있는 보일러실에는 여행용 캐리어와 쌀이나 김, 술 같은 식료품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들어있다. 대부분 필요가 생겨 문을 열더라도 그 행위가 귀찮지 않을 정도의 빈도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2.
청소기, 휴지, 세제보다 작고, 더욱 자주 사용되는 물건들이 있어야 할 장소는 어디일까?
팬트리에 다른 물건들과 뒤섞인 채 있으면 단번에 찾기 힘들 정도로 작고, 필요할 때마다 문을 열기엔 귀찮을 정도로 사용 빈도가 높은 물건들 말이다.
택배를 뜯을 때 필요한 칼이나 가위, 메모에 필요한 볼펜, 수시로 발라줘야 하는 핸드크림, 잊지 말고 먹어야 하는 영양제처럼 자주 사용하는 작은 물건들이라면 눈에 띄는 곳에 두는 편이 좋다.
책상이 따로 있다면 책상 서랍이나 책상 위에 있을 법한 물건들이지만 나처럼 집이 좁아 테이블을 책상 겸 식탁으로 쓰고 있다면 칼이나 가위는 밥을 먹으며 바라보는 식탁 위 풍경이 되기엔 조금 애매한 물건들이다.
3.
나는 그런 물건들을 로스코그 Raskog 카트에 둔다.
로스코그 카트는 3단으로 된 선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4개의 바퀴가 달려있는 형태이다.
3단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여러 종류의 물건을 분류해 수납하기 용이하고 바퀴가 있으니 어디든 쉽게 옮겨서 사용할 수 있다.
바퀴가 달려있다는 것은 로스코그 카트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이다.
나의 거실과 침실, 주방을 종횡무진 옮겨 다니며 유능한 비서처럼 다른 가구의 기능을 보완해 준다.
테이블 옆에서는 책상 서랍으로, 소파 옆에서는 잡지를 두는 선반이나 커피잔이 놓인 트레이를 올려두는 티 테이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침대 옆에 둔다면 협탁이 되겠지.
거실을 위한 수납장, 서재를 위한 수납장을 별도로 두기 힘든 상황이라면 로스코그 같은 이동식 선반이 훌륭한 대안이다.
‘식당과 거실, 근데 이제 서재를 곁들인’ 우리집의 테이블처럼 여러 기능을 동시에 하는 가구는 작은 집을 알뜰하게 활용하는 방법 중 하나인데,
로스코그는 다양한 기능에 더해 이동성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다.
4.
우리집 로스코그 카트의 가장 윗 칸에는 칼과 가위, 줄자, 스테이플러 등의 문구류와 핸드크림, 유산균, 영양제 같은 것들이 올려져 있다.
두 번째 칸은 이제는 더이상 발행되지 않는 철 지난 이케아 카탈로그 몇 권이, 눈에 잘 띄지 않는 맨 아래칸에는 물티슈와 관리비 영수증 같은 것들을 둔다.
테이블을 책상이자 식탁으로 사용하고 있는 나는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나 아이패드, 커피잔 정도를 제외하고 다른 물건은 사용 후 바로 치우는 편이다.
문구류가 어질러져 있으면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때 책상에서 밥을 먹는 기분이고,
다른 주방용품이 올려져 있으면 노트북으로 이런저런 작업을 할 때 무언가 맥락이 맞지 않는 공간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어서다.
필요한 것이 생기면 손을 뻗어 로스코그 선반에 정리돼 있는 물건들을 꺼내어 쓴다.
5.
이케아에는 로스코그 말고도 다양한 옵션의 카트가 있지만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로스코그의 형태가 마음에 들었다.
높이가 일반적인 테이블 정도로 적당하고, 모서리가 둥글둥글 모나지 않은 것이 안심이 되었다.
나는 대체로 부주의하여 여기저기 잘 부딪히곤 하는데, 하도 자주 있는 일이라 웬만해선 부딪히고도 상처를 살피지 않는다. 옷을 갈아입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멍들이 어느 날 발견되는 식이다.
로스코그는 적어도 그럴 염려가 없다.
로스코그의 컬러는 시즌마다 다양하게 나오는 편인데, 내가 구입하던 당시에는 레드/브라운이 있었다.
어떤 아름다움은 관계 속에 있다고 믿는 나는 그 믿음에 심취한 나머지 컬러 선택에 신중하다 못해 소심한 편으로, 내가 그동안 골라 온 가구들은 대체로 무채색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엄밀히 말하면 무채색은 컬러도 아니다. 무채색은 ‘색감과 채도 없이 명도만을 가진 색깔을 총칭’한다.)
그럼에도 이 레드/브라운 컬러만큼은 결정에 찰나의 시간 정도가 걸린 것 같은데, 붉은 계열의 따뜻한 색감을 가졌다는 점과 채도가 높지 않아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집의 다른 가구들과 어울릴 것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작은 물건들을 주로 수납하므로 선반의 공간은 충분하다.
정리의 달인들이 이 카트를 사용하고 있다면, 이 선반 위의 물건들조차도 오와 열을 맞추려 들지도 모르겠다.
정리의 달인이 아닌 나조차도 복도 수납장의 문을 열 때마다 그 안에 대강 놓인 물건들을 보며 뭔가 질서가 필요하단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적어도 이 작은 물건들이 있을 장소를 한정해 준 것에 만족한다.
오늘 아침에도 로스코그 Raskog 카트 위에 올려 둔 손맛이 좋은 가위를 꺼내 쿠팡 봉투를 뜯었다.
봉투에서 꺼낸 물건을 정리하고 가위를 카트 위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았다.
모든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어쩐지 안도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