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딸아이가 구구단을 배우고 있다. 내가 구구단을 배울 때는 단순히 외우는 게 전부였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원리를 먼저 설명해주고 외우게 한다. 어쨌든 여전히 구구단을 암기하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가 구구단 문제를 풀다가 기억이 나지 않으면 자꾸 스마트폰 계산기를 사용해서 쉽게 풀려고 한다. 계산기를 사용하면 쉽게 풀리는 문제를 굳이 머리를 써서 풀어야 하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요즘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필요한 정보를 정말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다. 와이프는 양배추 삶는 법이나 딸기 씻는 법을 유튜브에서 배운다. 나는 자동차로 어딘가를 가고자 할 때 언제나 내비게이션 어플을 먼저 켜고, 딸아이는 궁금한 게 생기면 스마트폰으로 검색한다. 심지어 요즘에는 대학원에서 논문을 쓸 때도 통계에 대해 깊이 있게 배우지 않아도 된다. 통계 프로그램을 돌려서 결과를 도출해 주는 사람까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굳이 어려운 통계 프로그램에 대해서 배우지 않아도 학위를 취득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정말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한때 유홍준 교수의 도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계룡산 남매탑의 사연을 알면 두 개의 탑이 애틋해 보이고,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제작과정을 알면 그것이 위대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쉽게 들어온 것은 쉽게 나가는 법이니까.
요즘 직장인들은 경력개발에 대한 니즈가 굉장히 높다. 예전처럼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하는 욕구가 더욱 커진 것이다. 마케팅 전문가, 디지털 전문가, 인사 전문가, 영업 전문가처럼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본인이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자 노력하면서 현재 하고 있는 일에서는 만족하지 못한다. 내가 진행하고 있는 '커리어코칭 프로그램'에서도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있는 사람과 코칭을 진행하고 있다. 코칭을 받는 사람의 흥미(좋아하는 것), 적성(잘하는 것), 가치관(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성격(타고나서 편한 것) 등을 심리검사로 찾아보고, 그 4가지를 통합하여 본인에게 적합한 커리어를 찾아가게 된다. 총 여섯 번에 걸쳐서 진행되는데 코칭을 받는 사람들은 본인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미래 커리어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었다며 대부분 만족스러워한다.
그런데 나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만으로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도서 '열정의 배신'의 저자 칼뉴포트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전문성이 없이 열정만 좇으면 머지않아 그 열정은 사그라들어 결국 없어져 버릴 것이다.' 원하는 직업을 얻기 위해서는 단지 열정만이 아니라 훌륭하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경영전문가 구본형은 '직장인이 회사를 나와 1인 지식가가 되고 싶다면 회사에서 약 4천 시간을 수행하고 나와야 한다'라고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매일 3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면 대략 4년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문가가 되는 일은 나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직 지루하고 힘든 과정이 남아 있는 것이다. 요즘처럼 쉽고 빠르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서는 이 과정이 상대적으로 더욱 더디고 어려운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날 TV에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는데 어떤 참가자의 노래가 감동스럽게 들렸다.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참가자의 가창력도 뛰어났지만 가사 자체가 가슴에 와 닿았다. 뮤지컬 서편제의 '한이 쌓일 시간'이라는 곡이었다. 원래 서편제는 1993년에 상영된 한국영화였는데 몇 년 전에 뮤지컬로 공연되었다고 한다. 서편제의 주요 내용은 판소리꾼 아버지가 소리에 대한 집착으로 본인의 딸을 훌륭한 소리꾼으로 만들고자 딸의 눈을 멀게 한다는 것이다. '한이 쌓일 시간'이라는 노래는 서편제 뮤지컬에서 불렸던 곡들 중에 하나라고 한다.
한이 쌓일 시간
소리, 소리가 뭐길래
여기까지 걸어왔나
모두 다 내 곁을 떠나고
이젠 너도
언젠가는
너만의 세상을 찾아서
떠나가겠지
나는 혼자 남아
못 다 이룬 꿈을
뒤돌아 본다
마음의 소리를 들어라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세상 향해
뼛 속 깊은 한을 토해내
소리를 질러
사무치게 미워
나를 원망하며
깊어질 소리
그땐 알아
모든 건 시간이
시간이 필요하단 걸
사무치는 시간
한이 쌓일 시간
깊어질 시간
그땐 알아
(*혹시 노래를 들어보고 싶으시면 유튜브에서 '팬텀싱어3 한이 쌓일 시간'을 찾아보시면 됩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 달라. 우리가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한을 쌓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쉽게 들어오는 것은 쉽게 나가는 법이다. 필요한 정보를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깊이를 갖으려는 노력은 갈수록 부족해지는 것 같다. 원하는 전문가가 되고, 평생직장이 아닌 평생직업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 깊어지기 위한 노력,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