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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화영 Jun 19. 2024

명확한 것은 항상 좋은 것인가?

명확함의 함정

회사에서 여러 부서가 함께 추진하던 중요한 프로젝트가 크게 잘못된 적이 있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리더가 기대했던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회사의 리더는 크게 실망했고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부서장들에게 그 책임을 묻고자 했다. 각 부서장들에게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는지, 당신은 이 프로젝트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리더는 부서장들의 답변을 보고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핑계만 덴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지시는 모두 부서의 R&R을 명확하게 정리하라는 것이었다. 이번처럼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누구도 핑계를 데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인사업무에서는 명확함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많다. 아무래도 인사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누구를 채용하고 어떤 업무를 줄 것인지, 구성원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보상할 것인지의 기준을 세우고 운영하는데 명확함이 중요하다. 부서별 R&R를 정하는 일도 그런 일이다. 그런데 항상 명확한 것이 좋은 것일까?


리더의 요구에 따라 각 부서장은 팀 R&R과 팀원 R&R를 작성하고 몇 차례에 걸쳐서 보고했다. 부서 간에 걸쳐있는 애매한 업무들은 나누거나 한쪽으로 정리했다. 그런데 그렇게 정리하다 보니 문제들이 생겼다. 각 담당들 업무까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작성하고, 부서 간 그레이존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작성한 내용은 여러 차례 수정해서 다시 보고를 해야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정리가 돼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수정할 일이 생겼다. 비즈니스 상황이 변화하고 거기에 따라 사업 전략과 계획이 수정되면 R&R도 맞춰서 수정되어야 했다.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리더의 의도대로 R&R은 점차 명확해졌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들이 생겼다. 여러 차례 수정해서 보고해야 하는 일 때문에 생기는 구성원들의 스트레스, 부서 간 업무 조정으로 생기는 갈등들이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일이 생기면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생겼다. 책임을 더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라서 업무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 되었고 업무에 대응하는 속도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각 부서와 구성원들은 점점 경직되어 갔다.


“직무기술서라는 것은 이제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다시 말하면 내 일과 다른 직원의 일을 명확하게 구분해서는 안된다.”
“모호한 직무의 경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경계에서 하나의 팀이 되어 움직일 수 있을 때 조직은 활력을 가진다. 직무보다는 프로세스를 이해해야 한다.”

- 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 -


명확함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길을 만들 때 길 주변이 불필요하다고 모두 절벽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 길을 안심하고 걸어갈 수 있을까? 적당한 그레이존이 필요하다. 그레이존은 구성원들에게 안전감을 주고 그곳에서 새로운 시도가 가능해진다. 업무 시간의 일부를 구성원들이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같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모든 업무 시간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를 대할 때나 필요한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R&R은 큰 단위에서 정해지면 된다. 추진해야 하는 일의 목적과 방향 정도를 정해 놓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세부적인 내용까지 명확하게 하려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될 뿐만 아니라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구성원들이 경직될 수밖에 없다. 부서 간의 원활한 협업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먼저 문제를 잘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먼저 해결책을 찾고 시도하려 한다. 한때 유행했던 6시그마라는 방법론의 DMAIC 프로세스에서 첫 번째 이니셜인 D는 Define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잘 정의해야 한다.

어쩌면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유는 부서의 역할이 모호해서가 아닐 수 있다. 이 프로젝트에 적합한 사람들이 참여했는지, 시간과 자원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환경이 변했는지, 아니면 애초에 불가능한 계획이었는지, 해결책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정의하는 것이 필요했다.


업무가 명확해지면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분명해지니까 추진력이 생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이 원활해지고 오해를 줄일 수 있다. 이런 명확함이 주는 이점을 얻으려면  그 명확함의 수준과 내용, 명확함을 요구함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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