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에 대하여
군대 시절, 일병 중반 즈음에 들어섰을 때 중대의 소대장들이 모두 바뀌었다. 아무래도 장교 임관 후 처음 부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입 소대장은 항상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가끔 이런 지나친 열정 충만이 부하 병사들을 피곤하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의 옆 소대인 2소대의 소대장은 빠른 적응을 위해 부하 병사들과 허물없이 지냈다. 동네 형 동생 대하듯이 병사들과 편하게 지내며 운동도 같이 하고 PX에서 음식도 자주 사주며 다른 소대장들에 비해 빨리 적응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본인도 부하들이 편해진 건지 선을 넘는 듯한 행동들을 보였다. 병사들을 몸으로 괴롭힌다던지, 간식 등을 빼앗아 먹는다던지, 외모나 출신 지역으로 조롱 비하를 한다던지 말이다.
한날은 김 이병이 사이버 지식정보방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여자와 채팅을 하고 있었다. 뭔가 놀려먹을 거 없을까 하고 어슬렁 거리는 2 소대장에게 김이병은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다른 병사들에게 김이병을 못 움직이게 붙잡으라 하고 2 소대장은 상대방 여성에게 말도 안 되는 음담패설을 채팅으로 보냈다. 마치 김이병이 보낸 것처럼 말이다. '으하하하' 하고 웃으며 사지방을 나가는 그의 모습에서 학창 시절 약한 친구들을 괴롭히던 일진들를 연상케 했다.
한날은 중대에 폭력 사건이 터졌다. 이 사실을 미리 인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던 중대장은 병사 관리의 차원의 문제로 소대장들에게 호되게 질책을 했다. 그리고 아직도 만연한 악폐습을 끊고자 중대에서 대대적인 '마음의 편지'를 시행했다. 마음의 편지란 병영 부조리를 막기 위해 병영생활의 고충을 익명으로 비밀 편지에 적는 것이다.
아무리 군대 생활이 더러워도 중대에서 이렇게 대대적으로 시행하는 마음의 편지는 조금은 조심스럽다. 왜냐면 추후 발생되는 후폭풍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그냥 '더러워서 참지' 하며 감내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의 2 소대장의 만행과 행태를 보고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 소대장의 만행을 '일진놀이하러 군대에 온 것 같다'라는 비유로 마음의 편지를 제출했다.
마음의 편지를 시행한 지 한 두 달이 흘렀던 것 같다. 일상에 크게 변화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날은 1년에 두 번 정도 있는 중대 회식을 하는 날이었다. 회식 날 만큼은 선후임 할 것 없이 가벼운 술 한잔을 들이키며 그동안 고생한 우리에게 격려와 수고를 보내며 부대원들의 사이를 돈독히 한다.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즈음, 2 소대장이 우리 소대 쪽으로 왔다. "자 1소대도 그동안 수고 많았다. 자 우리 앞으로 더 잘하자. XX중대 파이팅!" 하며 건배를 권했다. 이후 다른 선임들과 웃으며 얘기하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내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리고 어깨동무를 하며 내 귀에 대고 나지막이 읊조리듯 말했다.
나 일진 하러 온 거 아니거든?
순간 일 그러 지는 표정을 부여잡느라 애쓰는 나의 모습을 보고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 이 세상의 모든 정의가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바로 중대장에게 가야 할 마음의 편지가 중간에 소대장들에게 필터링되어서 제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본인을 저격한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병사들의 필체를 대조해가며 나라는 범인을 찾아낸 것이다.
그 날이 있은 후, 나와 2 소대장의 관계는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2 소대장도 아마 마음속으로 벼루고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나라는 존재를 의식하면서 행동한 것 같다. 물론 나도 구태여 2 소대장과 엮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시간은 흘러 전역 날이 밝았다. 모든 중대원들이 모포말이를 해주며 배웅을 해주었다. 그리고 간부 한분 한분 인사를 드릴 때 2 소대장과 눈을 마주쳤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해주는 그를 보니, 나 또한 그동안 쌓인 증오와 분노감이 사그라졌다. 어쩌면 이 더러운 조직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에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남아 있는 후임들의 안위 따위는 걱정이 안 되는 내가 조금은 비겁하게도 느껴졌더.
21살이라는 나이에 조직의 부패와 정의를 부정당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부조리를 맞서 끝까지 싸우지 못하고 굴복하게 되었다. 모든 걸 감내하기엔 어린 나이였다. 물론 중대장에게 넘어가진 않았지만, 나의 편지가 그에게 장교 지휘관으로서 조금의 행동 변화에 영향은 주었을까? 비리와 부정부패가 만연한 이 세상에 작디작은 이 아우성이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되었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