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캡슐
손편지가 주는 감성은 실로 대단하다. 내용 자체에서 주는 감동도 있지만 한 땀 한 땀 글을 써가며 삐뚤 하던 정갈하던 그 사람의 필체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있다. 특히나 요즘 같이 손가락 몇 번이면 텍스트를 전달할 수 있는 시대라 더욱 손편지가 가치 있게 느껴지는 이유다.
살면서 손 편지를 써볼 일이 있을까? 내 인생을 통틀어서 손 편지를 쓴 경험은 손에 꼽힌다. 초등학교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학급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았다. 문방구와 팬시점에 파는 센스 있는 입체 카드를 사서 메시지를 적어 보낸 게 내 손편지의 시초인 것 같다. 크리스마스 카드라 정형화된 내용을 적지만 손으로 누군가에게 글을 써서 건네준 건 이것이 처음인 것 같다.
하지만 전혀 예상할 수 없던 공간에서, 그리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대상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시절이 있다. 바로 군 복무 시절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와 친구들은 1년이라는 자유를 반짝 만끽하고 다시 군대라는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나 하나 건사하기 힘들지만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의 생사(?)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각자의 자대 배치 주소를 공유받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자신의 중대 소속과 병과를 소개하고 병영 생활들을 이야기했다. 힘든 훈련이 있었으면 훈련의 경험담, 선임들의 성격, 전역 후 계획 등 이야기들을 한 자 한 자 꾹 꾹 눌러 담았다. 어찌나 할 말들이 많은지 한통을 쓰다 보면 편지지 5장은 그냥 채워졌다.
아무래도 편지를 보내고 먼발치의 친구에게 닿아 다시 친구가 답장을 써서 내 소속 부대로 오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길었다. 따라서 당장의 답장을 기대하진 않았고, 그저 내 편지가 친구 부대로 잘 전달되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가끔 찾아오는 친구들의 편지는 방전된 군생활의 배터리를 점프시켜 주는 긴급 출동 기사님의 존재와도 같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제법 짬이 찬 이후 위병소 야간 조장 근무를 하게 되었다. 들리는 건 고라니 울음소리뿐인 적막한 새벽의 시골의 위병소에서 앞에 놓인 건 사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컴퓨터뿐이다. 지루한 위병소 근무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것은 사회에 있는 가족들과 군 복무 중인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그래서 시간도 많고 상대적으로 눈치를 덜 보던 상 병장 시절에 편지를 더 많이 썼던 것 같다.
전역한 지 12년이 흐른 지금,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군 시절에 받은 편지들이 생각났다. 당시에 편지를 주고받았던 친구들에게 '내가 보낸 편지 다 가지고 있니?' 하고 물어보니 다 있다고 한다. 우리는 조만간 만나서 각자가 지니고 있는 편지들을 가지고 와서 교환해서 읽어 보기로 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었던 그 시절, 내가 썼던 편지를 읽어보고 당시 나의 감정 상태를 느껴보고 싶다. 얼마 남지 않은 군생활을 돌이켜 보며 전역 후 앞으로의 각오와 찬란한 미래를 그려나가며 편지를 쓰던 그 순수했던 열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