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마흔을 맞이하다

작은 손을 붙잡아 나를 다시 세우는 시간

by 온택

오래된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가끔 현실 감각이 흐릿해진다. 방금 꺼낸 추억은 분명 생생한 10년 전의 것인데, 돌이켜보면 스무 해가 지난 일이다. 시간이 빨리 흘렀다는 상투적인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 시간의 시곗바늘은 여전히 그 시절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데, 달력만 혼자 조용히 페이지를 넘겨버린 것 같다. 그 괴리감을 비집고, 며칠 뒤면 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뀐다.


마흔이다.


숫자에 유난 떨고 싶지는 않지만, '4'라는 숫자가 주는 무게감은 확실히 다르다. 세상은 미혹되지 않는다며 ‘불혹’이라 부르고, 요즘은 ‘영포티’라며 분수에 맞지 않는 아저씨 취급을 하기도 한다. 그 어떤 말도 내 옷처럼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청춘이라기엔 몸이 무겁고, 중년이라기엔 마음이 아직 여물지 않았다. 그 어정쩡한 경계선에 서 있는 기분이 썩 개운치만은 않다.


몸은 정직하게 신호를 보낸다. 스트리밍 앱의 재생 목록은 돌부처처럼 변하질 않고, 대화 중 툭툭 튀어나오던 재치 대신 머릿속 새치가 더 도드라져 보인다. 무엇보다 회복력이 예전 같지 않다. 하루를 밤새우면 이틀을 앓아야 원상 복구되는, 효율이 떨어진 배터리가 된 기분이다. 머리는 20대의 속도로 달리고 싶은데, 몸은 40대의 속도로 걷고 있다. 이 엇박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꽤나 쓰리다. 나이 듦은 그렇게 예고 없이, 일상의 틈새로 조용히 스며든다.


요즘은 이 나이를 체감하기 위해 부모님의 마흔을 자주 떠올린다. 엄마가 마흔이었을 때 나는 이미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자신의 젊은 날 대부분을 자식에게 쏟아부으며 살아온 엄마의 마흔과, 이제 겨우 세 살 아이들을 키우는 나의 마흔은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애송이 같고, 또 다른 한쪽은 갈 길이 먼 현역처럼 버둥거리고 있다. 같은 마흔이라도 부모 세대와 내가 느끼는 시차는 꽤 크다. 이 선명한 '시차'가 묘하게 나를 일으켜 세운다.


세 살배기 아이들에게 아빠의 나이나 흰 머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녀석들이 원하는 건 자기를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는 팔의 힘과, 지치지 않고 함께 뛰어줄 체력뿐이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나의 늙음을 거부하고, 나에게 강제로 청춘을 연장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40대라는 숫자를 핑계로 늘어질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가장 순수하고도 무거운 책임감이다. 아이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닳아가는 무릎을 펴고 다시 달려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늦깎이 부모가 누리는 유일한 특권일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치열하게 젊음을 유지해야 할 명분이 있으니까.


나는 여전히 10년 전의 나를 착각하고, 삐걱대는 몸을 어색해하는 초심자다. 하지만 상관없다. 세상이 나를 무엇이라 부르든. 나는 그저 내 아이가 필요로 하는 가장 튼튼하고, 가장 따뜻한 40대의 품이 되어줄 것이다. 먼 훗날, 내 아이가 자라 자신의 마흔을 마주할 때 기억해 주기를. 그의 아빠는 단순히 나이 든 어른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가장 뜨겁게 오늘을 살았던 사람이었음을. 그렇게 나는, 나의 마흔을 기꺼이 맞이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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