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족에 사는 세상

그들만의 리그

by 온택

작년 뉴발란스 운동화 중 992라는 모델이 14년 만에 재발매되었다. 992라는 모델은 스티브 잡스가 키노트를 할 때 항상 신고 나오는 운동화로 우리에겐 익숙하다. 그런 제품이 오리지널과 헤리티지의 감성을 그대로 유지해 재발매한다니, 구매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발매는 일정 수량을 래플 이라는 한정 방식으로 발매를 했다. 돈이 있다고 다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추첨을 통해 구매권을 당첨된 사람만이 구매를 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발매 직후 해당 모델이 정상가의 10~20만 원 정도 웃도는 가격으로 개인 간에 재 거래되곤 했다. 실제 나이키, 아디다스에서 특정 모델을 한정판으로 발매하거나 GD와 같은 유명 아티스트와 코라보레이션을 한 제품들은 완판 이후 리셀 시장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프리미엄이 붙는다. 그래서 운동화 같은 패션 아이템이 시세 차익을 벌어들이는 재테크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굳이 재테크로 활용하지 않더라도 한정판과 프리미엄은 붙은 운동화를 신었을 때 만족감은 어마어마하다. 흔히 좋은 차를 사면 '하차감'으로 탄다고 말하지만, 한정판 운동화를 신었을 때는 '자신감'으로 신는 것 같다. '나 한정판 구했다. 쩔지?' 라는 느낌이려나. 물론 뉴발란스 992가 그 정도의 희소성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가격은 아닐지언정, 예쁘고 핫한 신발을 힘들게 구했다는 것에 매우 뿌듯함이 있었다.


한날은 992 새 운동화를 처음 신고 나간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있던 일이다. 누가 봐도 고무 냄새 가득하고 삐까 뻔쩍한 새 신발을 신고 오니 모두가 내 발을 쳐다보며 한마디 씩 거들었다. 그리고 약간의 불편함이 뒤따랐다.


"행님~ 이거 철수(가명) 같은 신발이네요?"

"어? 철수가 992 이 신발을 신고 있다고?"

"네~ 이거랑 똑같은 거던데요"

"에이~ 철수가 992를? 그럴 리가 없는 앤 데, 제대로 본거 맞나?"

"아 이거 맞아요! 똑같네~"


매우 힘들게 구한 992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철수가 진작 신고 있다는 소식에 새 신발을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이 괜스레 머쓱해졌다. 그날 모임은 자리에 없던 철수의 운동화 생각에 대화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또다시 이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었다. 이날은 철수가 참석했고 철수의 운동화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에이~ 철수 운동화는 992가 아니고 993 이잖아~~!"


철수의 신발은 992 가 이니라 993이었다. 실제 뉴발란스는 992 모델 발매 이후 993이라는 신규 모델이 나왔다. 디자인의 디테일이 조금 바뀌었고 오히려 기능성은 증가한 모델로 자동차로 치면 페이스리프트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꾸준히 판매되고 있고 단종이 되지 않으니 누구나 쉽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두 운동화 차이점 찾기


그러나 문제는 친구들이 아무리 쳐다봐도 누구도 992, 993을 구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관심이 없거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들 눈엔 그냥 뉴발란스 회색 운동화 정도로만 인지된다. 이 말인즉슨 내가 아무리 힘들고 비싸게 992를 구해본들 993을 신고 있는 사람과 똑같이 보일 거라는 말이 된다. 두 가지의 운동화가 전혀 다른 신발이라고 뉴발란스의 역사와 디자인의 각각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는 내가 구차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 운동화를 사는 사람의 심리는 무엇일까?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으로 살까? 혹은 이것을 아는 사람이 알아봐 주는 데서 오는 뿌듯함으로 살까?


얼마 전 친구들과 셀프세차 모임이 있었다. 단순히 세차장에서 제공되는 장비로 세차는 하는 나에 비해, 한 친구 녀석은 수십 가지의 솔, 브러시에 명품 카 샴푸에, 철분 제거제, 왁싱 도구에 세차장을 하나 차려도 될 수준의 장비 빨을 자랑 했다. 심지어 몇몇 제품은 해외 구매 대행으로 받은 상품도 있다고 했다. 최근 차를 바꾸더니 녀석이 본격적으로 세차의 늪으로 빠졌구나 싶었다. 세차 직후엔 당연히 깨끗해지고 주행 후 더러워지는 건 매한가지인데 어찌 이리 세차에 시간과 돈을 들이냐는 질문에 친구는


"도장면이라는 것은 겉보기엔 깨끗해 보일지 몰라도 미세한 흠집이 생기곤 해 그래서 ~ 어쩌고저쩌고~ 코팅이 어쩌고저쩌고~ "


순간 이 녀석의 말에서 뉴발란스 992와 993의 차이점을 주저리 설명하고 있던 내가 오버랩되었다. 사람은 지극히 단순하다. 본인이 관심이 없고 흥미가 없는 분야에는 상대방이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 설명해도 크게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공들인 것에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해서 대단히 실망할 것도 없고, 상대방의 주입에 크게 동요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스스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면서 까지 신는 운동화의 의미는 결국 나만 느낄 수 있는 자의식, 만족감인 것이다. 결국 돌이켜보면 인생은 뭐든 내 만족으로 사는 것이었다.


물론 가끔은 인스타에 올린 나의 신발을 누군가 알아봐 주지 않을까 하는 괜한 기대감도 있고 이것을 알아봐 주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에서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결국 이런 걸 좋아하고 아는 우리들만의 리그라는 생각에 내가 소속된 리그 내에서나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