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3년
고등학교 시절, 내신 시험기간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광경이 있다. 과목 별로 시험을 다 치고 나면 종료 종이 울리자마자 아이들이 그 과목을 잘하는 친구들에게 우르르 달려가서 가채점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친구의 정답을 100프로 확신하고 함께 답을 미리 대조해본다는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항상 선망의 대상이다. 본인의 정답에 친구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는 것은 뭔가 멋지고 대단해 보였다. 물론 나는 공부를 특출 나게 잘하진 않았다. 그래서 시험 친 직후 친구들이 답을 대조해보려 올리는 전혀 없고, 오히려 내가 답을 확인하러 가는 언제나 팔로워의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제2 외국어가 내신 정규 과목으로 포함되었다. 물론 나는 일본어를 선택했다. 중 3 때부터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일본어 독학하는 게 흥미로왔고 또래 아이들 누구보다 능숙하게 잘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티가 났던 것일까? 자연스레 친구들 사이에서 '은택이는 일본어 잘하는 친구'로 인식이 잡혀 있었다. 대망의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학교에서 처음으로 일본어 시험을 치르는 날이 왔다. 시험을 치기 전부터 '드디어 나도 친구들이 달려와 가채점을 해보겠지?'라는 생각에 들떴다. 시험은 무사히 마쳤고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나에게 가채점을 하러 오는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본어 시험인데도 친구들은 평소 수학, 국어, 영어를 잘하는 반에서 1,2 등 하는 친구들에게 가채점을 하러 갔다. 나는 친구들에게 일본어를 잘하는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명확히 공부로 증명이 되지 았았고, 내신 시험과는 별개로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반에서 1,2 등 하는 친구들에게 고등학교 내신 수준의 일본어는 제로의 베이스라도 어느 정도 공부하면 기본으로 100점을 거뜬히 따 낼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나름 자신 있다고 생각한 과목에도 불구하고 순간 일말의 패배감과 좌절감을 맛보았다. 그리고 더 이상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절실히 느낀 순간 이기도 했다.
한 학년이 마무리되면 과목별 전교 1등을 하는 친구들에게 '교과목 우수상'을 준다. 나는 일본어 교과목 우수상을 받았다. 상을 건네주는 선생님의 표정에서 국어, 수학, 영어 교과목 우수상을 줄 때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 교과목 우수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모없는, 그리고 누구나 어느 정도 공부하면 딸 수 있는, 상으로서 전혀 가치가 없음을 깨달았다. 특기를 살려 진로를 일본 관련 쪽으로 생각해볼까?라고 생각한 나의 꿈이 오히려 처절히 짓 밟히는 순간이었다.
이후 내가 진짜 잘하는 게 있긴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좋아하고 잘하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을 느낀 순간 나에겐 더 이상 희망도 미래도 없었다. 그렇게 내 고교 3년은 아무런 특기도, 재능도, 진로도 탐구하지 못한 채 자존감만 바닥을 쳤던 우울한 시간이었다. 빛바랜 교과목 우수 상장을 뒤로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