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만 해도 부요해지는 길, 선재길

by 파묵칼레

새벽 포근한 공기를 가르며 집을 나섰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도시를 뒤로하고 오대산으로 향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월정사에 이르는 선재길을 걸었다. 발걸음이 산으로 향할수록 마음은 점점 더 차분해졌다.


도시의 소음은 아득해지고 선재길에 들어서니 고요함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오대산 계곡을 옆에 두고 천천히 걸었다. 겨울 끝자락 오대산 청정한 내음이 폐부를 스쳤다.


낙엽이 덮여 폭신폭신한 길도 있고 그늘에 가려 아직 눈이 두껍게 깔려 얼어있는 길도 있었다. 발끝에 닿는 감촉의 다름을 느끼며 자연의 시간도 다름을 느꼈다.


선재길 옆 계곡은 얼어붙어 있으나 얼음장 밑에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얼음장 밑에서 졸졸 흐르는 그 소리는 봄의 서막을 알리는 속삭임 같았다. 겨울이 자리를 내어주는 순간이었다.


선재길은 언제 와도 잘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온한 길이다.


경사도 급하지 않아 숨이 차지 않고 자연스레 걸음이 느슨해진다.


물소리 바람 소리, 그 자연의 소리에 눈이 맑아지고 귀가 즐거워진다.


게다가 날씨까지 우리의 나들이에 한몫 거들어주었다.


늦자락 겨울 햇살이 내 머리 위로 쏟아질 때의 따스함은 행복이었다.

포근한 바람결과 맑디맑은 공기는 볼을 스치며 우리의 마음을 정화해 주었다.


자연의 리듬에 발맞추며 숲의 그림자가 되어 사진도 같이 찍고 소소한 이야기도 나누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중간중간에 만나는 다리에 머물러 걸어 내려온 계곡을 올려다보았다.


깊은 골짜기에는 우리가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봄의 기운이 스며 있었다.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에도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앉아 봄 마중을 하고 있었다.


다리 밑에 흐르는 맑고 차가운 계곡물을 보노라니 긴 시간 트레킹으로 몰려온 피곤함이 풀렸다.


투명한 물속에 몽돌들이 올망졸망 앉아 있는 모습조차 선재길이 내게 주는 선물이 되었다.


선재길 이름처럼 '善財'길은 이름에 걸맞게 걷는 이들에게 선한 맑은 재물을 주는 길이었다.


부질없는 욕심을 비우고 걷기만 해도 충분히 부요해지는 시간이었다.


계곡 아래쪽에 나무로 엮은 다리가 보여 빠른 걸음으로 갔다. 섶다리였다.


통나무 위에 솔가지와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지극히 소박한 다리였다.

사람들이 강을 건너기 위해 만든 지혜의 다리였다.


장마철이 되면 다 떠내려가고 다시 이듬해에 힘을 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삶의 방식을 시사한다.


또 협동과 배려라는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는 다리이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져 만든 정감이 깃든 다리이다.


이 다리 위를 걷노라니 옛 조상들, 아니 오래전에 이 다리를 건너갔을 누군가가 그려졌다.


그 이름 모를 숨결이 스며 있는 다리 위에서 난 여행자의 시선이 되어 있었다.


그 사라져도 다시 이어지는 정겨움이 스민 섶다리의 정서처럼 오늘 하루 우리 서로 잇는 따스한 발걸음이길 바래본다.


섶다리를 지나 다시 숲길로 들어서니 물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나를 감싼다. 고요함이 더 깊어져 있다.


선재길을 나와 월정사에 들렀다. 고즈넉한 대웅전 앞마당에 여행객들이 환한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있는 모습은 정겹기 그지없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사찰은 풍수지리가 기가 막히다. 산세 좋고 뒤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나무들이 포근하게 사찰을 안은 우리의 따듯한 정서를 새삼 느꼈다.


전나무숲길로 내려갔다. 전나무 사이사이로 빛이 잔잔히 내려와 축복처럼 다가왔다.

트레킹 끝자락에 다다르니 피곤함은 온데간데없고 발걸음이 더 가뿐해졌다.


바위와 숲, 바람을 가까이서 만난 시간, 선재길에서 주워 담은 바람 소리와 계곡 물소리가 내 가슴을 두드린다.


자연은 일상을 환기해 주고 잠시 멈추어 비워내고 다시 부요함으로 채워주는 에너지이다.


나의 발걸음은 선재길 위에 남아 있지만 그 길이 내게 준 울림은 오래 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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