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가 녹아내리다.

나는 행복합니다.

by 수메루


다음 날 회진 때 의료진에게 질문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됐습니다. 아빠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경험을 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사라지고 시공간이 없는 것 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상태에 있었고 그러고 나서 다시 태어난 것 같으면서 행복감이 가득한데 이게 뭔지 모르겠다고. 그러고 보니 전날 극심한 고통의 새벽 이후 심한 통증과 구토가 거의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 새벽 이후 완전히 다른 분이 되신 듯했고 기운을 되찾아보였어요. 줄곧 아빠는 행복하게 웃으며 고마워를 남발하셨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오 해피데이~’ 노래를 틈나면 흥얼거리셨어요. 이제껏 제가 본 적 없는, 평온하고도 행복해하시는 모습이았습니다.

아빠는 저와 엄마에 대한 그동안의 의문이 풀렸다고 하셨습니다. 저에겐 저의 한쪽 면만 보았었다고 이제 다른 모습을 알게 됐다며 하시는 말씀.

‘다 갖췄네... 우리 딸...‘

‘네가 우리 가족을 구했다’는 말씀도.

엄마와도, 애정표현에 서툴러서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던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주셨어요. 아빠가 행복해하시면서 엄마와 저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표현하시는데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한 번은, 아빠가 엄마를 바라보면서 안아보고 싶다고 하시자 어쩔 줄 몰라서 서계시는 엄마를 아빠 옆에 누워 안기도록 도와드렸어요. 그러자 아빠가 그러시더라고요.

’참 좋네... 따뜻하고 좋아... 참 좋다... 와... 이럴 수도 있구나. 어이... 외국인들이 환영인사할 때 개의치 않고 표현하고 그러는 게 다 이유가 있었다야... 응... 참 좋다야...’

몇 십 년간 두 분 사이에 흐르던 차가운 기류, 아쉬움, 원망, 단절감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사랑만이 가득했습니다. 엄마를 볼 때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천사, 여왕마마, 예쁜 내 마누라를 연발하셨습니다.

병실 밖에 상주하는 보호사 도우미분들께도 그전까진 적대시(?)하며 도움을 냉정하게 거절하며 경계하셨는데 이젠 마음을 활짝 열어 도움을 받기 시작하셨습니다. 고맙다고 하시면서 한분 한분 이름을 기억하려 하시고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통제에 대한 재밌는 일화도 있었어요.

낙상의 우려가 있어 기저귀를 착용하게 되셨고, 우린 괜찮으니 누워서 편하게 일 보시라고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빠 얼굴이 살짝 찌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빠, 통증이 있어요?’

‘아니... 대장을 통제하는 중이야’

'아빠 괜찮으니까 편하게 하세요. 이제껏 통제하면서 열심히 사셨으니까 이제 우리 다른 방식으로 해봐요. 계획이나 통제 없이 자연스럽게 맡겨봐요. 예측할 수 없지만,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설렘으로 맞이해 보아요!’

그러자 아빠 표정이 밝아지며

‘그래그래.. 그래 볼까...??’

호기심 가득한 소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예전과 달리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상태였어요.

아빠는 내내 제 얘기를 편안하게 들어주시고 마음으로 안아주셨어요. 그전엔 아빠와 저 사이에는 가시 돋친 시커먼 장애물 같은 것이 항상 느껴졌는데 이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았습니다. 10년이 넘도록 마음 관련 많은 작업을 하면서 간절히 바라던 상태였습니다.


마음껏 볼을 비비고 껴안으며 '사랑해요, 고마워요' '고마워 사랑해..' 시도 때도 없이 표현하며 마음을 나누었어요. 이토록 마음껏 몸으로 마음으로 안고 사랑하고 표현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았습니다.

한편, 수요일 아침 아빠는 형언하기 힘든 내가 죽은 것 같은 그 상태 이후 환생한 기분의 행복함이 어리둥절하면서도 궁금해서 원목 수녀님께도 여쭤보셨습니다(같은 날 의료진은 아무답도 할 수 없었죠. 의학적 상태가 아니었으니). 자신이 노력한 게 없는데 뭔가 엄청난 걸 받은 것 같은데 대가를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다고 하셨습니다. 환생한 것 같은 기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 원목수녀님(가톨릭병원 호스피스병동이라 수녀님이 거의 매일 들러주십니다)은 깊은 감동을 받으시고 개인적으로 오랜 영적 고민이 있었는데 그게 풀렸다며 오히려 아버지에게 고마워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거라고 그 선물을 편안하게 받고 감사하면 된다고. 그러니 아무것도 하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수녀님은 대세를 권유하셨습니다(대세는 임종을 앞둔 분께 특별하게 주시는 간소화한 세례입니다).

놀라운 건,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획하고 결정하시려던 아빠가, 종교에 대해 냉소적이셨던 아빠가 대세를 받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다음 날 수요일 아침에 신부님이 환자분들을 위한 기도를 하러 오셨을 때, 아빠는 병상에서 곱게 합장한 손으로 신부님께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웠어요. 작은 나인 에고가 큰 나에게 순종하는 모습이 저런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해하시더니 다음 날 제게 희망에 찬 제안을 하셨고 그 말씀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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