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해피엔딩.
살아보고 싶어..
기적 같은 이틀이 지나고 목요일 아침, 아빠가 엄마를 보며 방긋 웃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쁜 내 마누라 혼자 두고 가기 억울하다... 치료해서 살아보고 싶어....’
아... 정말... 젊은 시절부터 살기 싫다 종종 말씀해 오셨고 입원하고 나서는 삶이 언제 끝나냐, 치료는 안 받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던 분이, 왜 아직 안 죽고 살아있냐 회진 때마다 물으시던 분이, 이제 진정한 행복을 느끼자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셨나 봅니다. 너무나 해맑게.
저에게 종양이 작아질 방법을 찾아보면 좋겠다고, 아빠 생각엔 확률이 50:50이라고 방긋 웃으며 의지에 차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울면서 대체요법을 잘 아는 지인 약사분께 조언을 구해 급하게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대체요법 식품을 드실 때마다 저는 밝게 웃으며 ‘기적의 사나이 토마스!!’ 라며 아빠를 응원했습니다(호스피스 병동 수녀님께서 추천하신 세례명이 열두 제자 중 한 분인 토마스였습니다). 아빠는 마음을 활짝 열어젖힌 채, 긍정적으로 살 의지를 내셨습니다.
금요일,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엉켜서 조금 혼란스러워하고 기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행복해하셨습니다. 윤항기의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노래를 나직이 흥얼거리십니다. 저는 그때 아버지가 그 노래를 부르시는 걸 처음 들었습니다. 오시는 분들에게 경계심 없이 따뜻한 인사와 함께 사소한 장점을 자연스레 찾아서 아낌없이 칭찬하셨습니다(전엔, 문제점부터 먼저 찾으시더니). 이 또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날 기력은 약해져 갔지만 혈압과 맥박은 오히려 양호해지고 있었습니다. 혈압이 110/80으로 측정되자 저는 엄지 척을 해 보이며 ‘와...!! 아빠, 수치가 좋아지고 있어요!! 난 오히려 90/60 정도인데, 아빠는 110/80이래요. 와... 정말 대단해요!!’ 안심시키려 드린 말씀인데 오히려 아빠는 갑자기 세상 슬픈 표정을 지으시며 ‘안돼... 안돼..’하십니다. 당신 딸이 저혈압인 게 몹시도 걱정됐는지 그 행복했던 며칠간에 없던, 슬프디 슬픈 표정을 지으셨어요. 아빠의 커다란 사랑이 가슴으로 느껴졌습니다.
토요일 아침, 삶의 끝에 왔음을 예감하신 것 같았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작품이 완성됐다. 좋아지면 얼마나 좋아지고 나빠지면 얼마나 나빠지겠니.. 라며 끝을 암시하셨어요.
그러면서도 병실을 청소해 주시는 여사님이 오시자 뭔가 챙겨드리라며 나서셨고 더없이 따뜻한 모습이셨습니다. 전엔 어떤 서비스를 받을 때면 뭔가 더 드리거나 챙기는데 냉정하신, 딱 해야 할 만큼만 하시는 분이셨는데 놀라운 변화였죠. 그러면서 저희에게 반복해서 ‘베풀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오후 네 식구 모두가 모여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문득 엄마에게 밝게 웃으며 손가락 브이를 만들어 보이시며 말씀하십니다.
우리.. 해피엔딩...
일요일 아침, 잠에 깨어 엄마를 바라보며, ‘이쁘다... 이쁘다...’ 하고 웃으십니다. 하루 종일 기운이 없어 잠든 듯이 계시다가도 엄마가 볼에 입을 맞추자 양손에 엄지를 치켜세우십니다.
오후가 되자 좀 슬퍼진 표정으로 가족들을 찾는 얼굴이네요.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워서 슬픈 눈망울로 저희를 바라보십니다..
월요일부턴 하루 종일 거의 잠을 주무십니다.
그렇게 긴 잠에 빠지시더니 화요일 해질녘 석양이 아름답게 드리워진 창가에서,
가족이 모두 모여서 아빠를 바라보며 손잡은 가운데 조용히 영면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일주일 동안, 아빠는 고마움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진정으로 행복해하셨습니다.
아빠의 모습을 줄곧 지켜보신 원목수녀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정말 엄청난 신의 축복이라고. 신앙이 있는 사람도 죽음 앞에서 대부분 심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고마움과 사랑이 가득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그리고 다시 태어난 듯한 체험도 그렇고요.
한때 저는 아버지께 고마움은 있는데 사랑이 없어서 의아해하며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40여 일간 간병을 하면서 제 자신에 대해 깨달았습니다.
아빠를 많이 사랑하고 싶었고
그래서 많이 미워했고
알고 보니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커다란 미움 속에 사실은 더 큰 사랑을 품고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없지만) 어쩌면 신이 이번 생에서 제게 빛인 사랑을 체험하라고 어둠인 미움을 설정해 놓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아빠와 보낸 시간은 저희에게 기적적이고도 선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이 이 시간을 위해 이뤄졌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시 수능을 보고 약사가 된 것,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고 약국에 근무하게 된 것, 마음공부를 하게 되고 상담을 받게 된 것 등 어느 하나라도 빠졌다면 불가능했을 시간이었습니다.
엄마와 저의 오랜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고 아빠가 진정으로 행복하셔서 감사했습니다. 제 마음속에 있던 갈등과 다툼의 자리에 이제는 사랑과 감사로 가득함에 고맙습니다.
당시 아빠의 독특한 체험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필사적으로 버티던 에고가 녹아내리면서 내면의 큰 나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식과 깨달음에 대한 여러 책에서 나오는 체험과 비슷했거든요. 아빠의 달라진 모습은 완고한 고집쟁이 통제대마왕인 에고의 껍질 안에 숨어있던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아빠는 사랑과 감사, 그 자체였어요. 우리 인간은 알고 보면 모두 참나의 존재이고 순수한 사랑의 존재라더니. 어쩌면 모든 사람의 영혼은 저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겠구나 싶으면서 순수 영혼의 모습을 엿본 듯합니다.
아빠의 그런 고슴도치 같은 껍질 안에 그토록 보드랍고 아름다운 속살이 숨겨져 있었다니. 어쩌면 앞으로는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미워하기 어려워지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돌아가시기까지 시한부 선고 후 불과 두 달 반.
건강하셨던 모습의 기억이 대부분이라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이래도 되나 싶게 마음이 평온했습니다.
아빠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밉다 보니 마음 한편에서 그분을 닮은 저를 밀어내고 있었는데 자랑스러워지니 제 자신도 자랑스러움에 긍정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사진과 빈자리를 보면 벌써부터 그리움이 언뜻언뜻 스치고 가슴이 조금 먹먹할 때도 있지만... 지금은 그저 마지막 일주일 동안 함께 했던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간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아버지가 지구별의 여정을 잘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가셨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2021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