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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단 Oct 25. 2020

완벽함의 또 다른 이름

영화 <블랙스완>

인정하기 어려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이고, 둘째는 자신의 결점이다. 이 글에서 다룰 내용은 '결점'에 관한 이야기다.

결점은 아주 작고 사소하더라도 눈에 쉽게 띈다. 장점은 완벽에 도달한 상태이고, 단점은 그렇지 못한 상태이다. 교정이 필요한 문제인 셈이다. 자기 객관화가 불가능한 개인은 타인의 강점과 자신의 약점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자신을 깎아내리는 동시에 상대를 공격한다. 이 굴레에 갇힌 사람들도, 갇힌 줄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여기, 영화 <블랙스완>의 니나와 니나의 어머니처럼.



주인공 니나는 발레리나다. 어찌나 성실한지 발레단에 가기 전에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종일 발레 연습을 하다가 곧장 집으로 귀가한다. 요새 발레단은 떠들썩하다. 발레단의 간판이 될 기회, '백조의 호수' 프리마돈나 자리를 두고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이전과 달리 백조와 흑조가 한 사람의 몫이다. 유약하고 맑은 백조와 카리스마 넘치고 악랄한 흑조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니나는 수석 무용수였던 베스의 뒤를 잇고 싶다. 베스의 개인 대기실에 몰래 들어간다. 거울 앞에 앉아 분장대 위에 놓인 물건들을 바라보다가 훔친다. 충동이었다. 잘못된 걸 인지하면서도 니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는다.

소수의 무용인들에게만 주어진 프리마돈나 오디션 기회. 니나의 백조 연기는 훌륭했다. 기술은 완벽하다. 좋았던 흐름은 흑조 연기를 하며 끊긴다. 새로운 솔리스트 릴리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니나는 발을 헛디딘다. 허무하게 오디션이 끝났다. 온전히 릴리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흑조 연기를 하는 내내 단장이 지적했다. 너무 뻣뻣해, 그렇게 말고, 자유롭게 해. '자유'. 친구도, 취미도 없이 발레와 엄마가 전부인 니나가 한 번도 갖지 못한 것.

니나의 모든 것에는 어머니의 손길이 닿았다. 분홍색과 인형으로 뒤덮인 방, 잘 때마다 켜는 오르골, 매일 입는 분홍색 코트까지. 옷을 갈아입는 것마저 엄마가 관여한다. 평소보다 귀가가 늦으면 바로 벨소리가 울린다. 니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로 만드는 엄마. 어떤 이유일까?



애정으로 포장된 집착

28살, 니나가 생기는 바람에 발레를 그만두어야 했다. 꿈을 포기하지 못했다. 대신 니나에게 물려주었다. 성장하는 딸의 모습에 대리만족감을 느꼈다면, 니나를 뭐 하나 제대로 못하는 아이로 만들지 않았을 거다. 엄마는 가끔 니나와 경쟁한다. 프리마돈나 자리를 얻은 니나. 엄마에게 전화해 들뜬 기분을 나눈다. 환호로 응답하는 목소리. 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준비한 분홍색 케이크가 보인다. 니나에게 주려고 크게 한 덩이 자르는 엄마. 니나가 저지한다. 많은 양이 부담스럽다. 엄마는 정색한다. 축하가 필요 없다며 쓰레기통에 케이크를 버리려고 한다. 니나가 다급히 먹겠다고, 고맙다고 말하자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하다.

엄마는 니나의 도약을 축하하려던 것일까? 큰 역할을 맡아보기도 전에 발레를 관둬야 했던 엄마. 그런데 제 딸은 주인공 배역을 따낸다. 아이러니하다. 니나 때문에 그 자리에 가지 못했는데, 니나는 자신 덕분에 그 자리에 갔다. 발레리나로서 니나에게 경쟁심을 느끼지만, 니나의 성공은 곧 엄마의 성공이기도 하다. 엄마는 양가감정을 느낀다. 다만 분노를 억누르기만 했던 터라 제때 분출하지 못한 감정이 이상한 타이밍에 불쑥 튀어나왔다.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몇십 년 간 계속된 이유. 거울에 답이 있다. 니나는 거실에 놓인 세 면의 거울 앞에서 스트레칭을 한다. 엄마는 니나의 정면, 양 측면, 그리고 뒷모습까지 모두 본다. 언제든 니나의 모든 면을 살피고 바꿀 수 있었다. 엄마의 우위는 니나가 완벽함에 사로잡히면서 깨지기 시작한다.

정해진 스케줄, 정해진 동작, 정해진 호흡, 정해진 리듬, 정해진 취향. 엄마의 욕망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자신은 갖지 못했던 최고의 경지. 그 정점을 위해서는 완벽함이 필요하다. 흑조만 마스터한다면 누구도 니나의 연기를 지적할 수 없으리라. 연습량을 아무리 늘려도 니나의 흑조는 계속 인정받지 못한다.



반면, 릴리는 칭찬일색이다. 동작이나 기술의 정확성은 니나보다 부족하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빈 공간을 채운다. 관객과 배우 모두를 매료하는 흑조의 모습. 단장이 원했던 대로다. 니나는 릴리를 경계한다. 처음엔 단순히 경쟁자로서 견주던 마음이었다.


니나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이 커질수록 자해가 심해진다. 손톱으로 피가 날 때까지 등을 긁고, 환각과 환청을 듣고 본다. 등에 난 상처 주변이 새의 피부로 변했다고 생각하거나 말을 왜곡해서 듣는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강박 때문에 릴리가 자신의 대역인 것에도 위협을 느낀다. 죄책감의 변형이다. 수석 무용수 베스의 자리를 꿰차고 싶었던 니나. 실제로 베스가 사고를 당하자, 바람이 현실로 이어졌다고 느낀다. 이젠 니나가 베스다. 병실로 찾아가 훔친 물건을 테이블에 늘여놓고 나온다. 하지만 공포는 더욱 심해진다. 정신이 무너져 내린다.


이 변화를 엄마가 눈치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공연 날, 니나는 엄마의 다친 손을 공격하며 방을 탈출한다. 거침없는 발걸음에는 분노가 서렸다. 완벽함을 반드시 증명하겠다는 결의. 완벽함을 위한 강박이 소용돌이의 핵심임을 모른다. 베스의 물건을 돌려주어도 죄책감을, 불안을, 열등감을 떨쳐낼 수 없다. 니나는 분장을 한다. 베스가 쓰던 대기실에서, 니나가 물건을 훔쳤던 거울 앞에서.



감정이 눌려 강박이 되다

공연의 시작은 니나가 자신 있던 백조였다. 하지만 연습할 때 한 번도 하지 않은 실수를 저지른다. 백조 캐릭터가 니나에게서 튕겨져 나왔다. 완벽과 멀어진다. 불안은 더욱 커졌다. 흑조로 분장을 바꾸려던 중에 니나는 환각을 본다. 자신의 대기실에 멋대로 들어와 릴리가 흑조로 분장한다. 니나의 흑조가 부족하다며 실력을 깎아내리고, 폄하하고, 위협한다. 거울을 마주한 니나가 니나 자신에게 퍼붓는 말. 화를 참지 못한 니나는 상상 속 릴리를 거울에 밀친다. 유리파편이 주변에 쏟아지고, 그중 하나를 집어 릴리의 목을 찌른다. 그리고 흑조로 변신해 무대에 나선다.


니나가 바라고 바랐던, 완벽한 흑조였다. 단장의 말대로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찬사 받은 니나. 대기실에서 마지막 준비를 한다. 이윽고 진짜 릴리가 대기실 문을 연다. 대단한 연기였다며 니나를 칭찬하고, 사라졌다. 그럼 모두 니나의 망상인가? 아니다. 유리파편은 니나의 배에 박혔다. 피로 물드는 배. 니나는 개의치 않고 백조로 분장하여 마지막 연기를 선보인다. 연습할 때 니나가 멈칫거렸던 피날레. 하지만 이번에는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완벽했어.


고통이 아닌 만족감으로 물드는 얼굴. 황홀한 표정. 완벽을 향한 집착은 열등감을, 열등감은 자기 파멸의 길로 흘렀다. 열등감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 죄책감, 중압감과 부담감, 잘하고 싶은 욕구, 불안, 공포가 뒤섞였다. 니나는 소위 말하는 '나쁜' 감정을 다룰 줄 몰랐다. 주변 사람이라고는 엄마가 전부인 니나. 거절의 의사도 받아들이지 않는 엄마에게 좋은 말밖에 할 줄 몰랐다.


감정은 순간순간 누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없어졌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표출하지 못한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 목 끝까지 차오른다. 이제 감정은 시한폭탄이다. 누군가 던진 농담에, 조언에, 혹은 일상적인 대화에 갑자기 터진다. 입이 열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다. 감정의 일부가 밖으로 나가고서야 입이 닫힌다. 후회가 이어진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욱함'이다.


욱하는 '성격'이 아니다. 감정을 제때 적절한 방식으로 풀지 않은 결과다. 사람들은 희망차고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 불만, 불안, 공포, 짜증, 화, 슬픔, 우울처럼 흔히 '부정적'이라고 일컫어지는 감정은 대개 숨기려고 한다. 감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슬플 땐 슬픔을, 괴로울 땐 괴로움을, 우울할 땐 우울함을 충분히 느끼는 게 좋다. 감정 표출을 받아줄 주변인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발화'가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그림, 글, 혼잣말, 운동, 노래 등 감정을 무엇이든 괜찮다. 감정을 검열하고 누르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스릴러, 드라마, 미스터리


러닝타임

108분


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


출연

나탈리 포트먼(니나 役), 밀라 쿠니스(릴리 役), 바바라 허쉬(니나 엄마 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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