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신분제는 원래부터 없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

by 호단


장르: 사극, 좀비 아포칼립스, 스릴러
극본: 김은희
감독: 김성훈, 박인제
원작: 만화 <신의 나라>
러닝타임: 시즌1 총 6화, 306분 / 시즌2 총 6화, 269분
출연: 주지훈, 배두나, 류승룡, 김혜준 등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방송사: 넷플릭스


2019년, 넷플릭스에 새로운 오리지널 시리즈가 등장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음성, 외관, 배경까지. 한국판 <워킹데드>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드라마 <킹덤>의 시작이었다.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역병이 창궐한 조선, 그 원인을 쫓으면서 여러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이야기. 떠들썩한 반응을 느끼면서도 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장르물을 선호하지 않아서였다.


대개 장르 영화는 특징이 뚜렷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관람자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 좀비를 한 번 떠올려본다. 광기 어린 눈빛, 기괴한 움직임,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스산한 분위기. 시각이 약하고 청각과 후각에 강하다. 여기에 이야기를 덧붙인다. 세상이 좀비로 물들어 가고 주인공 무리는 아슬아슬하게 생존한다. 주인공과 가까운 듯 먼 이들은 도중에 죽기도 하면서. 러닝타임이 삼십 분 정도 남은 중요한 시점, 누군가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보통은 이전의 일상에서 잘못을 저지른 자가 유언을 남긴다. 그리고 나름 희망찬 끝을 보여준다. 어른들은 죽고 아이들만 살아남은 식으로. 예시는 좀비물이지만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흐름이다.


장르물 자체는 좋다. 그런데 다름이 있길 바랐다. 시청각적으로 자극적인 소재(좀비 등)를 활용하되 그것에 기대지 않는 장르물, 어디 없을까? 적어도 좀비를 다룬 영상물에서는 <킹덤>이 가장 앞섰다고 생각한다. 다소 억지스러운 전개에도, 답답한 상황에서도 중도하차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킹덤>을 이야기해본다.



경계와 경계


궁금증 하나. <킹덤>의 어떤 요소가 신선했을까? 먼저 사극, 그러니까 신분제가 존재하던 조선이 배경이라서 전개가 색달랐다. <킹덤>의 김은희 작가는 말했다. 시즌1은 굶주림을, 시즌2는 피를 그렸고 앞으로 제작할 시즌3에서는 한(恨)을 그리고 싶다고. 제작자의 의도대로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자신의 시선을 덧붙이면 해석이 풍부해진다. 나에게 첫 시즌의 키워드는 신분제, 그다음 시즌은 신분제의 붕괴였다.


조선의 신분제는 크게 천민과 양민(평민, 중인, 양반)으로 나뉜다. 사극 콘텐츠는 대개 신분제의 견고한 틀 안에서 권력의 이동을 보여준다. 왕족과 양반의 다툼을 그리거나 왕족의 피가 흐르는 천민이 출생의 비밀을 깨닫고 부패한 세상을 구하는 식이다. <킹덤>도 이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후궁의 아들 세자 '이창'과 해원 조 씨 가문의 갈등이 두 시즌의 주를 이루었다. 이다음부터 이창 무리가 역병의 원인을 찾아가면서 생기는 일을 다루겠지만, 좀비화가 된 이유보다는 그 이유를 밝히면서 '드러나는 현실'이 기대된다. 나에게 좀비는 탐욕과 부조리함을 드러내는 극적인 소재이지 이야기의 중심은 아니라는 말이다.


<킹덤>에서 신분제가 시각적으로 느껴졌던 건 어느 밤, 세자 이창이 좀비를 피해 부리나케 도망가던 장면에서였다.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은 세자가 꾀죄죄한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달렸다. 얼빠진 얼굴에는 공포가 서렸다. 어두운 때라 이창의 짙은 남색은 눈에 띠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이창은 그들 중에 가장 눈에 들어왔다.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럼 고귀한 왕족 사이에서는 한 무리처럼 섞여 드는가? 그것도 아니다. 조 씨 가문이 장악한 왕실에서 이창은 이단아 취급받는다. 어린 황후가 아들을 낳으면 완벽하게 지울 숙청의 대상이기도 하다.


d1.jpg


왕족이지만 왕족이 아니고, 평민은 더더욱 아니다. 이 애매하고도 위태로운 자리에서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이창은 조 씨 가문 앞에서는 자신이 왕족임을 강조하고, 그들의 '더러운 피'와 비교한다. 도발하려는 의도였다. 조 씨 가문이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피. 하지만 그 의도 속에는 이창의 강박이 담겼다. '다름'이다. 자신은 사리사욕에 눈먼 자들과는 다르다. 절규와 닮은 그 외침은 의무처럼 들렸다. 왕실은 이미 손 쓸 방법이 없다. 이미 조 씨의 것이다. 그렇다면 궁궐 밖, 백성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 나는 이 잘못된 세상을 바꿀 존재다. 믿고, 따라오라. 이창은 그들과 다름을 증명해야 생존할 수 있는 존재다.


이 절박함은 백성의 굶주림과 닮았다. 쌀 한 톨마저 구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웃의 시체를 양식으로 삼는다. 그렇게라도 해서 살고 싶은 처절함과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은 비참함. 애석하게도 그 무거움을 견디던 사람들이 역병을 퍼뜨리는 시작점이 되고 만다. 좀비가 되어 입을 쩍쩍 벌리고 달려드는 모습은 끔찍하다. 동시에 안타깝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이 비극적으로 발현된 형태처럼 느껴진다. '생사초'라는 식물의 촌충이 죽은 자의 뇌를 조종한다는 사실이 있음에도 말이다.


모두 굶주렸다. 누구는 배고픔에, 누구는 권력에, 누구는 생존에. 이렇게 굶주린 자들이 들끓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굶주리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유를 제쳐두고 우선 싸우고 보는 이들 사이에서 묵묵히 물음의 답을 찾는 사람, 의녀 '서비'다.



요동치는 경계


서비를 이야기하기 전에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정확히는 연기력 논란에 관한 언급부터 하고 싶다. 배두나 배우의 연기력을 문제라고 꼽는 이들은 말했다. 연기가 어색하다.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못한다. 하지만 서비는 <킹덤>에서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우선 신분부터 짚고 넘어가 본다. 의원은 중인이고, 의녀는 천민이다. 그러니까 서비는 '천한 출신'이다. 천민은 중인과는 달리 궁에 갈 일도, 갈 생각도 할 수 없다. 생활 반경은 작디작은 지율헌이 전부였던 서비.


d2.jpg


하지만 역병의 근원지, 지율헌의 생존자가 되면서 방향이 달라진다. 여태 쌓아온 의학 기술과 담대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세자 이창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에 가담한다. 그 과정의 일환으로 입궁하기도 했다. 진실을 부단히 좇는 서비는 올곧고 맑다. 단순히 손에 피를 덜 묻혀서가 아니다. 서비도 필요할 땐 좀비를 향해 날을 겨눈다. 다만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소신을 믿고 따르는 서비. 서비의 '어색함'이야말로 서비를 드러내는 키워드다. 경이로움은 낯설고, 낯선 것은 대개 이상해 보인다.


천민이면서 양반의 일을 하는 서비와 왕족도 천민도 아닌 이창. 두 사람이 만든 균열이 궐내에도 퍼졌다. 세자의 동생, 즉 고귀한 혈통을 물려받았을 아이 대신 왕족의 피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궁 밖의 존재가 왕의 자리를 채운다. 조 씨 가문의 겁 많고 어설픈 자가 어린 왕의 곁을 지키는 좌의정이 되고, 왕의 진짜 어머니는 궁인이 된다. 신분제가 무너졌다. 근본 없는 아이가 왕의 자리를 올라서가 아니다. 이미 무너진 신분제가 확실히 무너졌을 뿐이다.


역병이 퍼지고, 일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떤다. 어딘가로 도망가는 대신 무기를 손에 쥐어 든다. 그들은 안다.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을. 양반들은 무기를 배급받는 상황을 못마땅해했다. 천한 것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은 고고한 자신이 들기에 너무 흉측하다는 거다. 결국 그들은 도망친다. 백성을 다스리고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양반은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귀함을 지키는 일. 살아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지켜야 했다. 그래서 시신을 태우지 못하게 막고, 혼란을 부추기고,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백성들이 손에 쥔 낫은 적어도 살아 있는 사람을 향하지 않았다.


혁명은 가장 아래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출발점은 피라미드를 거슬러 오른, 가장 위다. 지배층은 전체의 극소수이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터진 셈이다.


겨우 이렇게 작은 벌레였다.


역병의 시작이 아주 작고 얄따란 촌충이었던 것처럼.



여기까지, 신분제를 키워드로 <킹덤>을 읽어보았다. 다음 시즌에서 새로 등장하는 '아신'이라는 인물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신분제의 붕괴가 시각적으로 그려지는 시점은 언제일지, 기대를 담아 글을 마친다.

keyword
호단 영화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구독자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