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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단 Oct 11. 2021

샛노란 머리칼에 가려진 것들

넷플릭스 영화 <Kajillionaire(카조니어)>

Kajillionaire. 낯선 알파벳 조합에 러시아어가 아닐까 생각했건만, 영단어였다. 백만장자, 억만장자처럼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 모든 일의 시작이 그러하듯 호기심이었다. 이상한 단어의 조합,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화 포스터. 대체 무슨 영화일까.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종종 떠올랐다. 구도나 연출 때문은 아니고, 묵직한 이야기와 대비된 천진난만한 색감이 닮아서.




BUBBLE


제목대로라면 주인공 올드 올리오와 그의 가족은 무지막지한 부자여야 하겠다. 하지만 이들은 우편함에서 남의 택배를 훔쳐 팔거나 쿠폰 환불, 경품 따위로 근근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나름 집도 있다. 하루에 두 번, 정해진 시간에 거품이 흘러넘치긴 하지만. 사무실 같은 그들의 집 바로 옆이 버블 공장이니 일정 부분은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들이 집에 가는 여정은 꽤 험난하다. 세 달 째 월세가 밀려 집주인의 눈을 피해 몸을 한껏 숙이고 가야 하니까. 여기서 눈에 담아둘 게 있다. 올드 올리오는 람보를 하듯 몸을 뒤로 젖혔고, 그의 엄마와 아빠는 앞으로 숙여 거의 비슷한 자세로 걸어간다는 것이다. 아빠의 모습을 엄마는 따르고, 올드 올리오는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이들이 사는 집의 월세, 500불. 그리고 3개월째 밀린 월세, 1500불. 나름 치밀하게 숨어 다녔지만, 집주인이자 공장장인 남자에게 걸리고 만다. 올드 올리오의 아빠는 능청스럽게 대꾸한다. 이번 주 일요일에 몽땅 내겠다고. 분노한 남자는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감정 과잉이라서 그렇단다. 영화의 초반부지만 이곳에 나오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다. 감정이 없거나 과하게 많거나.


아빠는 대책 없이 긍정적이다. 겨우 사나흘 만에 1500불을 구할 수 있겠는가. 그 일마저 올드 올리오에게 시킨다. 네가 쿠폰을 환불해 오고, 네가 우편함을 몰래 털어오고, 네가, 네가. 올드 올리오는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묵묵히 할 일을 한다. 그러나 기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어느 밤, 올드 올리오가 엄마에게 제안한다. 경품으로 받은 뉴욕행 프리미엄 좌석 2개를 일반석 3개로 바꿀 수 있다고. 엄마는 기함한다. 비행기 공포증이 있는 아빠가 탈 수 있겠느냐며. 그러자 올드 올리오는 단둘이 모녀 여행을 떠나자고 말한다. 이 말은 엄마가 짓밟고, 다음 날 아빠가 한 번 더 짓이긴다. 엄마가 아는 것은 모두 아빠의 귀에 들어간다. 둘이 꼭, 하나의 버블처럼.


모녀 여행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셋이서 뉴욕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1500불을 마련하기 위한 올드 올리오의 수책이었다. 올드 올리오의 수하물을 엄마와 아빠가 가져가고, 올드 올리오는 분실 신고를 해서 보험 보상금을 받는다. 터무니없지만 묘하게 그럴싸한 계획.


하지만 인생이 그렇듯 언제나 변수가 찾아온다. '멜라니'의 등장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테니까.


 




아빠의 옆좌석, 멜라니는 공포에 질린 아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준다. 자신이 안과 병원에서 일한다는 말에서부터 술 몇 잔이면 긴장이 싹 풀린다는 조언까지. 기나긴 비행시간이 지나자, 왜인지 그들의 계획에 멜라니가 합류하게 된다. 정작 모든 계획의 실행자 올드 올리오는 생판 남 취급을 받고, 멜라니는 진짜 딸처럼 환영받는다.


멜라니는 이 상황을 가볍게 생각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를 실제로 겪게 될 줄은 몰랐다고, 잔뜩 신이 나서 말이다. 1500불을 벌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낸다. 자신이 일하는 병원의 고객들에게 직접 방문해 골동품을 싸게 얻고, 비싼 돈으로 팔자고. 벼룩시장에서 팔면 된다는 멜라니의 말에 어쩐 일인지 올리오의 아빠는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막상 실행하고 보니, 역시는 역시다. 골동품은 뒷전이고 눈치껏 돈을 훔치는 데에 급급한 아빠였다. 어이없을 정도로 무탈하게 일이 진행되는가 싶더니, 두 번째 집에서 올드 올리오는 첫 번째 전환점을 맞는다.



홀로 사는 노인의 집.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다. 노인의 마지막 소원은 예전처럼 집이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올드 올리오와 일행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다. 아빠는 티비를 틀어 스포츠를 보고, 엄마는 접시를 꺼내 식사를 준비하고, 멜라니는 피아노를 친다. 가족 구성원 각각의 역할을 모두 하나씩은 할 줄 아는데, 올드 올리오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게 올드 올리오는 냉장고 수리공 역할을 맡았다.


겨우 얻은 1575불. 월세를 내도 모자랄 판에 아빠는 핫 터브를 할부 구매한다. 뉴욕에서 원래 살던 동네로 돌아온 그들. 예전과 똑같을 줄 알았던 일상은 묘하게 뒤틀렸다. 평소처럼 열쇠로 우편함을 여는 올드 올리오. 하지만 어느 열쇠도 맞지 않았다. 자신의 범행이 cctv에 잡힌 것이다.



그들의 사무실, 그러니까 집엔 핫 터브가 도착했다. 이미 설치가 끝났으니 환불도 불가능한 상태다. 아빠는 멜라니에게 직접 체험해 보자며 불을 끄고, 옷을 한 꺼풀씩 벗는다. 그러니까, 멜라니에게 잘해주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한 술 더 뜨듯 엄마는 접시 위에 크래커를 담아 건넨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인지 못하는 것이다. 정말, 올드 올리오의 엄마와 아빠는 말 그대로 한 몸이었다.


이때 올드 올리오가 집에 들어오고,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당장 떠나려고 하던 멜라니를 엄마가 붙잡으며 '허니'라고 칭한다. 올드 올리오는 생전 들어본 적 없는, 그 사랑스러운 호칭을 말이다. 자신을 언제나 앞장 세우고, 몫을 철저히 삼등분으로 나누고, 그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한 올드 올리오는 처절하게 말한다. 1575불을 다 줄 테니까 자신에게 허니라고 불러 보라고. 같이 춤추자는 것도, 팬케익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마디면 된다고.


엄마가 답했다. 못 해.

대신 멜라니가 나선다. 그 돈 받고, 자신이 해주겠다며.




RE-BORN



멜라니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둘은 리스트를 채워간다. 올드 올리오가 홧김에 말했던 것들을 말이다. 함께 팬케익 재료를 사고, 아침에 먹고, 춤을 춘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건 'Breast Crawl'. 신생아를 산모 배 위에 올려두면 아이가 본능적으로 젖을 먹기 위해 기어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언젠가 올드 올리오는 엄마에게 물었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 배 위에 올려뒀는지, 아니면 침대에 홀로 두었는지. 엄마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침대라고 답했다. 이쯤에서 올드 올리오의 이름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들어보자. 대리 출석을 했던 육아 수업을 찾은 올드 올리오. 아이의 보호자가 자신의 아이인 척하며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수업이었다.


올드 올리오는 자신의 아이,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특징 대신 이름의 어원을 말해 주었다. 자신이 금상첨화를 물어다 주기를 바라며 로또에 당첨된 노숙자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아이가 받아야 할 당연한 존중과 애정을 태생부터 누리지 못한 채 살았다. 그런 그에게 삶의 가장 첫 순간을 바꾸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일 테다.



아주 적절한 공간을 안다며 멜라니는 새까만 주유소 화장실로 데려간다. 말 그대로 암흑이었다. 이때 올드 올리오는 지진을 느끼고 공포에 빠진다. 옆에서 어떤 말로 진정시켜도 듣질 않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잠시 뒤 고요가 찾아오고, 올드 올리오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바깥의 소음이 올드 올리오를 일깨운다. 살아있다고. 이때 영화의 색감은 오묘해진다. 올드 올리오의 금발이 햇살을 받아 따스하나 색으로 물들고, 주유소 근처의 슈퍼에서도 그 노르스름한 빛은 여전하다. 무척이나 쾌활하고 밝은 올드 올리오의 말투와 표정, 행동도 한몫한다.


멜라니는 자신의 말을 모두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올드 올리오에게 꽤 불쾌함을 느끼는 눈치다. 하지만 이 마음은 곧 밝은 햇살 아래에서 사르르 녹는다. 아이처럼 몸을 엎드려 엉금엉금 기는 그 모습, 멜라니를 향해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보며. 마치 어린아이의 움직임에 그의 보호자가 기뻐하듯이.






그리고 멜라니의 집에 온갖 선물이 도착한다. 포장지에는 매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와 선물이 하나씩 담겼다. 물론 26살인 올드 올리오에게 17개의 선물이 끝이었지만. 마지막 18번째 선물에는 장소와 시간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서 네 사람은 다시 만난다.


아빠와 엄마는 자신들의 무관심함과 잘못을 뉘우치는 것처럼 보였다. 다소 과장스럽긴 해도 말이다. 올드 올리오의 이부자리에서 잘 자라는 다정한 인사까지 하고 갔다. 그들 답지 않게 숨겨둔 돈을 가져가지도 않았다. 둘은 안심하고 꽤나 감격하며 잠에 든다.


그리고 아침.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자고 일어나니 거실과 주방에 있던 가구, 소품, 러그 한 장까지 사라졌다. 숨겨둔 돈은 물론이고. 그들이 훔쳐가지 않은 건 포장지를 뜯은 생일 선물들 뿐이었다. 이 허무함을 안고 그들은 물건을 환불하러 간다. 이전처럼 사기나 눈속임이 아니라 진짜, 정당한 방법으로. 그렇게 나온 액수는 525불. 1525불의 3분의 1. 그러니까, 제 몫 하나를 얻은 셈이다.



그래도, 적어도 제 몫은 해냈다.

다른 한 편으론, 올드 올리오의 엄마 아빠가 베푸는 최대한의 '아량'은 딱 그 정도인 셈이다.


새롭게 태어났으니 삶도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 이젠 애정과 존중을 함께 나눌 존재와 함께다.




TOUCH


올드 올리오는 참 서툴다. 특히 서툰 건 조심스러운 손길을 받는 것. 환불이 안 되는 마사지 쿠폰을 들고, 60분 코스를 20분 만에 끝내 달라는 주문과 함께 마사지 베드에 엎드린 올드 올리오. 마사지사의 손길이 닿자 몸을 움찔 인다. 처음엔 이게 간지러운 건가, 그게 아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따스한 손길에 눈물이 주룩주룩 나는 거다.


눈물은 곧 감정의 발화다. 결국 올드 올리오가 허용한 범위는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허공이었다. 마임을 하는 것처럼 허공을 매만지는 마사지사의 손. 그 움직임이 닿기라도 하는 듯 올드 올리오는 숨죽여 운다. 


그리고 또 다른 손길이 나온다. 대리 출석을 해주러 갔던 육아 수업. 그 수업에서 상담사가 머리를 빗어주겠다며 올드 올리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단단한 제스처는 꼭 여기 기대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올드 올리오는 그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피한다. 지진이 느껴진다면서. 상대가 좋은 의도이든 나쁜 의도이든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크게 주는 것이 밀려 들어올 때, 그런 식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올드 올리오가 먼저 타인에게 닿았다. 멜라니를 잡으려다가 그의 가짜 손톱 하나가 떼어지고, 멜라니는 날카롭게 물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다 떼어버리지 그러냐고. 올드 올리오는 그 비꼬는 말투를 진중하게 받아들인다. 세심한 눈과 손으로, 멜라니의 가짜 손톱을 하나씩 벗겨낸다.


진짜 손톱과 가짜 손톱 사이의 끈적이는 흔적을 살살 긁어내면서 그렇게 하나씩, 멜라니의 진짜를 꺼낸다. 무미건조한 표정과 먼 곳을 향하던 눈동자가 제 손톱을 향하다니. 확신하건대 멜라니는 이미 마음을 열었다. 숨구멍을 막아두던 가짜 손톱을 공들여 치우는, 그 모습에.


이때 올드 올리오의 마음도 어느 정도 드러난 셈이다. 타인의 손길에 벌벌 떨던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손을 만졌으니까. 이 감정과 느낌을 언어로 정의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일목요연한 정리가 필요하지 않다. 특히 감정은 자주 그렇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은 넘실넘실 새어 나온다. 버블처럼.


버블을 치울 시간을 알리는 시계 알림음. 삐비 빅. 5초도 안 되는 짤막한 소리에 금세 불안해지는 몸뚱이. 행동을 훈련받은 것처럼 반응하던 올드 올리오. 떨어져도 연결된 상태였던 이전의 모습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제 그 '올드'한 이름도 바꿀 때이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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