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벚꽃이 만개하고 하늘엔 몽실한 구름이 떠다니는, 어엿한 봄이다. 다만 그 봄이 조금 과하게 느껴진다. 한낮의 온도는 거의 30도에 육박하고, 꽃잎은 쉴 새 없이 흩날리다가 떨어진다. 바닥에 물든 분홍과 빨강들. 이제 실감한다. 계절 또한 순간이다. 금세 지나갈 것을 알기에 그리 구경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순간을 붙잡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니까.
봄이면서도 초여름. 애매한 중첩을 보니 주인공의 이름이 떠오른다. 춘희. 기쁠 희, 좋을 희, 즐거울 희. 온갖 의미 중에서도 그의 이름 말은 봄 춘春, 계집 희姬. 봄의 계집이다. 출생등록을 할 때 잘못 입력한 한자. 동시에 탓하기 좋은 변명거리다. 일이 꼬이고 꼬여 문제만 생길 때에 문득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고. 원래 이렇게 되었으리라고.
자기 자신을 운명이란 이름에 가둬둠으로써 탄식하고, 연민하고, 모순적이게도 위로받는다. 춘희의 삶도 엇비슷한 것 같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여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이던, 누구에게나 있을 처연한 시기. 다만 춘희에게는 그 시간이 꽤 길었을 뿐이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는 춘희의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중학생 춘희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사촌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동갑내기 여자애는 쌀쌀 맞고, 그의 보호자들은 교묘하게 차갑다. 마치 떠안기 싫은 짐을 어쩔 수 없이 진 것처럼. 몸만 겨우 누일 수 있는 자그마한 다락방. 여러 이불을 켜켜이 쌓아 올리는 게 최선인 독방. 춘희에게 허용된 크기와 위치는 딱, 그 정도다.
지금의 춘희는 어떨까. 여전히 같은 방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알록달록한 전구도 놓고, 창가와 벽에 사진도 붙이고, 나름 아늑한 공간이다. 춘희는 살면서 많은 것을 갖지 못했을 테지. 특별히 안타깝다거나 불쌍하다는 둥 가치판단을 멋대로 내리고 싶진 않다. 단지 그 공간에 대한 춘희의 애착이 느껴졌을 뿐이다.
춘희의 일과는 퍽 단순했다. 일어나서 수경을 끼고, 마늘을 한 알씩 까고, 2kg는 족히 되는 것 같은 양을 어깨에 이고 식당을 찾아간다. 사촌 오빠가 운영하는 식당. 노동의 대가는 3만 원. 이런 일 말고 홀서빙을 하라는 제안에도 춘희는 고개를 젓는다.
춘희는 하루 3만 원을 통장에 차곡차곡 모으는 중이다. 이 같은 성실함은 간절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다한증 수술. 땀이 많아 금세 손이며 발이며 축축해지는 것이 춘희에겐 오래된 스트레스였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모든 공간엔 자신의 흔적이 남았다. 사람들은 그 흔적을 불쾌하게 여겼고, 춘희는 찌푸린 얼굴이나 날 선 목소리 따위를 빼곡히 기억했다. 어릴 때야 무덤덤한 표정에 가려 잘 드러나진 않았겠지만.
벼락과 천둥이 치던 날, 춘희는 평소처럼 할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중에 벼락을 맞는다. 검댕이가 묻은 얼굴로 집에 들어가 쓰러지듯 잠들었는데 웬걸. 제 몸 위로 이불이 덮였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이 없는 집인데 말이다. 의아한 상황은 곧 믿을 수 없는 일로 이어진다. 어린 춘희, 그러니까 중학생 춘희가 지금의 춘희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같이 마늘을 까고, 라면을 먹고, 대화를 나눈다. 춘희의 기억과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지금의 자신에게 있는 손의 흉터가 중학생 춘희에겐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다한증인 자신이 싫고 미워서 소각장 앞 불씨에 손바닥을 가져다댔는데 말이다.
춘희가 깊게 생각하지 않은 건 또 다른 일상의 변화 때문이겠다. 얼결에 참여한 모임에서 주황을 만났다. 말을 더듬는 주황과 땀이 흥건한 춘희. 자기 자신의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점을 그대로 드러낸 관계. 솔직해서인가,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춘희는 술김에 말도 안 되는 일을 들려주겠다며 중학생 춘희 이야기를 스리슬쩍 꺼낸다. 과거의 자신을 만난다면, 무얼 하겠느냐고.
주황은 아버지의 폭력에 매번 맞기만 하지 말고 한 번은 덤비라,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반면 춘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던가. 그 애에게 무엇을 해주고 싶은지, 무엇이 필요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모든 것이 나름 순조롭게 흘러갈 무렵 사건은 하나둘씩 생겨난다. 하나, 중학생 춘희가 사라졌다. 둘, 사촌오빠가 춘희에게 새로운 집을 구하라고 통보한다. 그 집을 매물로 올려놨다고. 셋, 모임 세미나에서 거금을 사기당했다. 다한증을 치료하려고 모아두었던 돈이 몽땅 사라진 셈이다. 모든 것을 잃기만 한다.
그러나 춘희는 침묵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 집이 어떤 의미인지, 자신의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목소리를 낸다. 물론 사촌에겐 얼토당토않는 얘기다. 집에 누가 거주하느냐에 따라 임대인 자격을 얻고 잃는 건 아니니까. 사실을 바꿀 만한 힘은 없었다. 애초에 그건 춘희의 목적이 아니기도 했다.
그저 중학생 춘희가 꾹꾹 눌러 두었을 진심을, 집에 대한 애착을, 자신의 보호자들을 향한 그리움을 발화하고 싶었을 테다. 수수깡으로 정성스레 만든 집이 제 허락도 없이 망가져 버려진데도 오히려 사과를 건네야 하는 시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상처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지금의 춘희로.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이런 대사가 나왔다. 어린 시절 학대받은 아이는 그때로부터 자라나지 못한다고. 10년이든 20년이든 시간만 흐를 뿐이라고. 몸만 커져서 어른처럼 보이지, 여전히 아이라고. 춘희는 자라지 못한 자신을 알아주기로 한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다 싫어하고, 미워하고, 불쾌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며 오롯이 견뎌온 상처들 또한 끌어안는다. 자신에게 남은 손바닥의 화상을 어린 춘희에게 되물려주지 않기 위하여,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지켜내기 위하여.
영화에서도 내내 보였다. 춘희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자 기이한 지점. 춘희를 진심 어린 눈으로 걱정했다가 날카로운 말씨로 돌변했다. 순식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여기서 카메라의 담긴 시선이 달랐다. 부드러운 상황을 보여줄 땐 상대방의 모습을, 춘희를 비난할 땐 춘희의 상처받은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춘희가 기억하는 타인의 모습은 일부일 뿐이라고. 모두 춘희를 미워하고 싫어한 게 아니라, 아끼는 마음도 존재했다고.
나 자신을 다독여준 후에야 춘희는 새 집으로 새 출발을 한다. 이제는 사촌 집의 다락방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갈 춘희. 자신의 점액질로 흔적을 남기는 민달팽이처럼 꿋꿋이 제 길을 걸어가길 바라본다.
*씨네랩에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참석 후 기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