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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은 행복해지고 싶었다

인간의 '이름'은 고작 이름, 그 이상이다

by 호단

*스포.


사람마다 영화 취향이 있듯 영화를 볼 때 주의 깊게 보는 점도 제각각이다. 연출, 영상미, 복선, 비지엠, 인물, 혹은 전부 다.

나는 캐릭터와 그들 간의 관계에 매력을 느낀다.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일까. 아무리 외계인이 주인공이고, 외계어를 할지언정 그 존재는 인간이다. 인간은 항상 자신과 주변, 더 나아가 사회 속 인간을 그려내니까.

가만히 그들을 보고 있자면 여러 의문이 생긴다. 왜 저런 행동을 할까, 왜 저런 말을 할까, 왜, 왜. 왜. 그 물음을 하나로 묶어 나만의 결론•해석을 만들고자 한다.

이 여정의 첫 영화는 <화차>.


—focus on : 강선영


Q. 선영은 약혼남을 사랑했을까?

아니.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은 순간에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본다. 억지로 좋은 척, 괜찮은 척하지 않는 선영. 무엇이든 끝을 느낀 인간은 마냥 공포에 떨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두려움을 숨기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위협을 한다. 날개에 눈 모양이 달린 공작나비가 적을 마주쳤을 때 날개를 쫘아악 펴는 것처럼.
적어도 약혼남이 주는 안정감에 행복을 느낀 것은 맞다고 본다. 죽기 직전 떠올린 장면이 악몽을 꾸던 자신을 약혼남이 달래주던 어느 밤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걸 사랑으로 인지하진 않았을 거다. 사랑과 행복은 다른 말이다. 선영은 약혼남이 아니라 그 누구든 자신에게 평화를 준다면 기꺼이 머물렀을 테다.


Q. 왜 난간 위에 올라서서 기다리다가 '선영아!' 불렀을 때 뒷걸음질, 즉 죽을 준비를 했을까?

차경선으로 태어나 오랜 시간 살아왔지만, 죽을 때만큼은 강선영으로 죽고 싶었을 것 같다. 그래서 난간 위에서 약혼남을 기다렸다. 유일하게 자신을 선영이라고 불러주니까.
차경선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에겐 공포다. 자신은 '차경선'이라고 불릴 때 항상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해야만 했다. 고아로 살고, 아버지의 빚을 상속받고, 사채업자들을 피해 도망치고, 끌려가고, 울고, 빌고, 부탁하고.
약혼남이 네가 사람이냐고 묻고, 선영이 답.
'나 사람 아니야. 나 쓰레기야.'
약혼남이 자신을 옥죄듯이 껴안고, 선영의 말.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 좀 놔주세요. 제발.'
얼마나 숱하게 들었던, 해왔던 말일까. 선영은 심지어 웃으며 말한다. 제 삶에서 단 한 번도 통하지 않았던 말이라 우스웠을까. 인생의 끝에 다다랐다고 느끼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거라서.


Q. 선영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모든 질문의 출발점. 몇 번이나 생각이 바뀌었다. 그만큼 어려운 질문이었다. 죽음과 무기력에 허우적대지 않고 이토록 강렬하게 삶을 원하다니. 결론을 내고 보니 답은 간단했다. 선영은 행복을 바랐다.
그는 다른 이름으로 살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다른 존재로 새롭게 살 수 있으리라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차경선'을 버릴 수 있다는 희망이 컸을 것이다. 인생의 모든 괴로움과 힘듦, 역겨움, 끔찍함이 응축된 이름을 완전히 벗어던질 수 있다면야. 원래의 삶과 정반대를 향할 거라는 기대, 혹은 기대를 넘어 확신이 생길 거다. 사람을 죽인 후 무릎을 기며 벌벌 떨다가 제 뺨을 때리며 결국 일어서는 그 집념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선영은 단순히 악한 존재가 아니다. 살고자 하는 열망, 다른 삶을 갖겠다는 집착, 그리고 희망. 온갖 욕망으로 가득 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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